노회찬, 그는 누구인가? 도대체 누가 그를 죽게 했나!

노회찬 의원의 죽음, 나흘째, 완벽주의 괴물, 작은 개혁가, 이렇게 조용히 촛불을 붙였다

등록 2018.07.25 15:29수정 2018.07.2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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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나기를 직관력이 떨어지는 나는 새로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군가들이 보고 무수히 좋아라한 드라마를 뒤늦게 보고, 남들이 입어서 눈에 익숙해진 유행 지난 옷을 입고, 오랜 시간 무심결에 귀에 흘러들어온 음악을 듣고 산다. 난 그렇게 한 박자 늦게 살아간다.

그런 내가 교사가 되고 아이들의 엄마가 된 이후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세상이 멈추거나 퇴행하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졌다. 살아보니 이놈의 세상 정말 힘들었는데, 내 소중한 아이들한테까지 이대로 물려줄 수가 없다. 내 아이들 만큼은 새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어진 것이다.

노회찬 의원님의 죽음 나흘째다.

기억은 자꾸만 1992년, 스물한 살적 나의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돈 10원도 누군가한테 도움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음악대학을 다녀야했던 나는 늘 바빴다. 최소한 매월 60여만 원씩은 벌어야 학비와 용돈을 충당할 수 있었지만 파트 타임으로 할 수 있는 웬만한 일거리는 시간수당이 천 원대에 머무니 학교를 다니며 벌 수 있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온갖 노동으로 사이 시간들을 메우며 돈벌이를 병행해야만 했다. 공강 시간엔 학교 도서관 사서 도우미를 하며 근로 장학생으로 일했고, 방과 후에는 동네 지인 자녀들의 공부를 도왔다. 야간에는 식당이나 술집에서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방학 때는 식당 서빙이나 백화점 판매원 같은 풀타임 일을 하며 좀 더 큰돈을 만들어 놓아야 했다. 그 와중에도 동아리를 두어 군데 들어 대학 생활의 낭만을 찾아 짬짬이 기웃거리기도 했다. 겉모양은 장애우 봉사 동아리지만 학생 운동을 주로 하는 동아리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운운하는 선배의 교육도 몇 번은 받았더랬다.

타고난 재능 덕에 운 좋게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빈민가에서 생활보호대상자(현재의 국민기초수급자)의 자녀로 자라 중학교 때부터 이미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공부해야했던 나에게 대학생활은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만 같았다. 사실상은 잘 젖어들지 못한 채 구경이나 해본 한 이방인에 불과했다. 틈만 나면 일터에 있었으니 깊이 있는 구경도 해보지를 못했던 것 같다. 도서관 사서 도우미를 하며 짬짬이 읽었던 막심 고리끼의 몇 권의 책에서 '이 끝없는 빈궁함에서 벗어날 무슨 좋은 방법은 없을까?'하는 궁금증을 품어본 것이 그나마 조금은 깊이 있는 구경에 속한다.

친한 친구의 언니가 당시 우리 과의 과대표였다. 그래서 가끔은 학생회 행사에 발을 들여놓고 구경할 일도 생기곤 했다. 어느 날 과대표 언니가 1,2학년 후배 몇 명을 모아 놓고 "우리학교에서 전대협 출범식이 있을 예정이야.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학생들이 음대에 머무르며 출범식에 참여해. 자원봉사단을 결성해야해. 알다시피 음대생들은 대체로 학생운동에 관심이 없잖아. 일손이 너무 부족해. 너희들이 꼭 좀 도와줘"라고 말했다. 나를 포함하여 주로 그 언니의 동생과 가까운 친구들 몇 명이서 함께 하기로 수락했다. 약속한 봉사활동 기간의 파트 타임 일정도 고용주의 눈치를 보며 조정해 두었다. 자원봉사단인 우리는 주로 청소와 생필품을 조달해주는 일을 했다.

첫 날 밤, 지방에서 올라온 동지들(아니, 내 입장에서는 동지라기보다는 나 같은 프롤레타리아를 구원해줄 강철대오 전사들이었다)은 뜨거운 축제의 밤을 보냈다. 분주히 움직이며 반갑게 맞이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그 다음 날 아침, 비위가 약한 나는 음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밤새 먹고 마시고 쏟아 놓은 토사물과 담배꽁초, 음식 찌꺼기들이 곳곳에 펼쳐진 채 여기저기서 나뒹굴며 자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약속한 대로 봉사활동을 마친 나는 믿었던 전사들을 향한 노여움을 거둘 수가 없었다.

"너희가 세상을 구원하다고? 먹고 마신 뒤처리조차 부모가 대신 해주며 오냐오냐 기른 귀한 집 아씨와 도련님들이? 주방 세제에 두 손이 퉁퉁 불은 너희들의 의뢰인이 이 냄새나는 오물들을 치울 동안 꿈속에서 잠꼬대로 새 세상을 만드니? 진짜는 여기 있어. 너희들은 대신 싸워줄 자격이 없어. 나 같은 사람이 스스로 잘 살아가는 게 개혁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씩 냉소적으로 변해 갔다.

일터와 일터 간의 이동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었던 내가 짧은 식사를 위해 이용한 곳은 주로 길가의 포장마차였다. 마포의 한 대학가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있는데, 두어 명의 대학생이 어묵 꼬치를 먹으러 들어 왔다. 아주머니는 "힘들지? 많이들 먹어"하며 학생들이 들고 있는 종이컵에 연신 어묵 꼬치를 보태어 주셨다. 단속을 피해 장사하는 아주머니의 근황과 안부를 주고받던 학생들은 다 먹고 나더니 "잘 먹었습니다!"하며 당연한 듯 어묵 값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시간당 2000원이 채 안 되는 일터로 가기 전 1000원짜리 떡볶이로 식사를 대신하던 나는 '이 노점 상인에게 있어 1000원의 크기는 또 얼마만큼이나 클까'를 생각하며 학생들의 뒤를 노려보았다.

단속 경찰과 결탁하여 장사할 자리를 제공하고 자릿세를 챙겨가는 조폭이나 행상들의 생계권을 외쳐주는 대신 무료 어묵을 먹고 가는 대학생들이나 상납의 크기만 다를 뿐 도무지 크게 달라 보이지가 않았다.

그 때 또 한 번, "아무도 대신 싸워줄 수 없어. 노동자 스스로 일어나야해"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 이후로 어떤 형태로든 학생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내가 할당받은 단 한 사람의 프롤레타리아를 구원하기에만도 나는 너무나 바빴다.

1991년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386의 끝물들과 대학생활을 같이하며 운동권을 구경하는 동시에 엑스 세대라고 불리는 1993년도 이후 후배들을 통해 오렌지족을 구경했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도 못해 늘 꾀죄죄하고 비쩍 마른 모습으로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운동권보다는 말끔하게 차려입고 적당히 즐기며 사는 오렌지족을 구경하는 게 차라리 더 흥미로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립중고등학교의 교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진짜 개혁은 교육에서부터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살아갈 주인공들을 기른다는 자부심에 내가 하는 일만을 제일로 여겼다. 가정교육도 공교육도 내 울타리 안에서 만큼은 새로운 세상의 대안으로 꾸려졌다. '내가 품고 있는 이 아이들이 우리가 살고 싶은 새 세상의 모티브가 되어 가리라'라는 기대를 품으며 야무진 야욕을 키워나갔다.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내심 엄청 뻐기며 개혁의 주역이라 자부하며 살아온 세월이다.

그러나 이 작은 개혁가의 1992년, 변심의 기억은 생의 곳곳에서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2012년 대선 이후가 그랬고, 2016년 촛불시위에서 또 다시 그랬다. 뭔가 내가 크게 잘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터와 가정 안에서의 개혁은 나와 함께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줄까... 세상이라는 큰 판은 바뀌지 않고 있는데, 내 가정, 내 교실 안에서 자라는 아이들만 잠꼬대 같은 새 세상을 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모순을 점차 알아채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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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촛불집회 참석 당시 사진 ⓒ 김선희


스스로를 구원한 프롤레타리아의 완벽주의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다니며 국비장학금으로 고등학교 3년을 어렵게 버텼던 나는 학력고사를 치르고 돌아온 날 모든 교과서와 참고서를 내다 버렸다. 재능도 없던 지긋지긋한 외우기 공부를 더는 하기도 싫었지만 대학입시에서 떨어진다면 다시는 도전 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간 실업계고등학교를 지망하여 자신의 학비뿐 아니라 생활비까지 보탠 맏언니와 달리 고등학교 3년 동안은 일을 병행하지 못했기에 염치가 없어서라도 다시 도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떨어진다면 내 부모처럼 그저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시라도 대학생활의 낭만에 취해 파트 타임 일정을 미루다가 짤리기라도 하면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 이자까지 갚아야하는 이중 처벌이 가해졌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했다.

그랬다. 진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기회가 너무나 적었다. 자기 한 몸 일으켜 세우기에도 빠듯한 자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하면 곤란하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간당간당한 삶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완벽주의가 나 하나만큼은 그럭저럭 구원할 수는 있되, 우리 모두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구원받지 못한 우리는 곧 내 삶의 이모저모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모래로 지은 성처럼 불완전했던 내 성취에서도 그 균열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제야 나는 모든 게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내가 진짜야"라고 뻐기던 작은 개혁가는 그제야 겸허히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걸어 나가 작은 기도를 보태게 되었다. 그리고 곧 보게 된다.

"타인의 아픔을 대신하여 외쳐주려 했던 그 분들이 써온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나는 노회찬 의원님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저 내가 평소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분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특별히 믿고 따르는 정치인이 없는 나는 막연히 '그는 보기 드물게 좋은 정치인인가보다'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 분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고 나서 70여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노회찬, 그는 누구인가? 누가 그를 죽게 했을까?'

나도 모르게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 미안함의 실체를...

'결국, 나 하나 살기에도 버거웠던 편협한 프롤레타리아들의 완벽주의가 노회찬 의원님을 죽게 한건 아닌가' 하는 데서 생각이 머물렀다.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10만 원짜리 수표로 커피 값을 내는 오렌지족의 삶은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는 이유로 크게 뭉뚱그려 대충 욕했지만 꾀죄죄한 운동권을 욕할 때는 세심하고 티테일하게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욕했던 눈이 성장하여 나 같은 완벽주의 괴물을 만든 것만 같았다.

재벌이나 부패한 권력과 손잡은 적폐세력은 애매하게 퉁 치며 욕하고 민초 그 자신이나 그들의 마음을 품은 정치인에게는 까탈스러운 매의 눈으로 독살스럽게 욕 해댄 게 아닐까 반성하고 또 반성해본다.

우리 모두 다 같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리고 노회찬 의원님에게 "나는 이토록 약하니까 당신이 나아가서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며 그 무거운 책임을 전가한 것은 아닐까?

돈과 힘을 추구하는 적폐 권력은 엄청난 돈과 힘으로 지원하는 맹목적인 지지자들에게 탄탄한 지원을 받으며, 다른 무리의 아픔은 외면하며, 강철 같은 멘탈을 키워나갈 동안 민중을 대신하는 세력은 '꼭 나만큼 고생해야만 그게 진짜야'라는 야멸찬 눈초리와 완고한 기대만으로 힘겹게 버텨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싸움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이가! 그러면서도 진보는 약하다고 되는대로 지껄이며 낙담하는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자가 될 수 있을까?

2018러시아 월드컵에서 국민들의 회초리를 맞으며 골리앗을 이기고 돌아온 손흥민 선수에게 16강 신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생달걀을 던진 자, 그는 과연 누구일까?

우리 자신이고 선수들 그 자신들이 아니었을까?

헝그리 정신에 호소하며 국민을 '뺑이 치게' 했던 과거의 국가권력이 그랬듯 우리는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그들을 대신해서 우리 자신들에게 없이 살아온 한을 풀어대고 있는 것이다. 끝 없이 돌아볼 일이다.

진짜 악한에겐 보복이 두려워 제대로 입도 못 떼다가, 아니, 너무 악으로 점철되어서 작은 악은 제대로 계산에 넣어 주지도 못하다가 내 편 들어주는 사람 만나면 평생의 한을 모아 훈장질 제대로 해댄 수많은 매의 눈 중 두 개가 내 것이 아닌지 수도 없이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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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촛불집회 당시 사진 ⓒ 김선희


몇 년 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진로 강의에서 전남대 교수, 김상봉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본다.

"나는 결코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분을 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잘못된 세상이 빚어낸 불량품들이다. 나 또한 잘못된 세상을 만드는데 오천만 분의 일의 지분을 보태어 왔다.

권력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다. 힘이 있거나 이름난 사람의 인권은 저절로 지켜지는 줄 알았던 소시민의 착각을 반성한다.

끝없이 애도하고 싶다. 끝없이 애도하자고 말하고 싶다.

애도의 물결이 파도처럼 일어나고 들불처럼 번져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기를 바란다. 그야말로 애도를 넘어선 애도가 필요하다.

더 이상의 의로운 죽음이 없는 사회를 꿈꾼다.

우리 모두가 잘못된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걸 인정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꺼내어 놓고 무수히 대화하자고 말하고 싶다.

나 자신과 상대를 향한 외침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더 싸워 나가야한다. 그것을 통해 성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세월호의 희생자를 향한, 그리고 노회찬 의원님을 향한 애도가 우리의 삶 속에서 더 오래 오래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70여 시간 동안의 반성을 통해 나는 이렇게 조용히 촛불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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