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 타는 가을

헌책방에서 만난 누군가의 추억

검토 완료

김선희(good77)등록 2017.10.22 15:02
온도, 습도, 채도, 명도... 모름지기 낭만에 젖기 딱 좋은 계절, 가을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명제는 도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걸맞기도 이를 데 없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회자되다 보니 누구나 가을이면 책을 가까이 하고야 말게 하는 마성을 발휘한다.

가을바람이 코끝으로 다가오자 발코니에서 기나긴 휴식을 취하던 자전거를 꺼내어 타고 헌책방 나들이에 나섰다. 큰 서점 못지않게 넓고 산뜻하고 편리한 시설의 헌책방에 들어서니 독서의욕이 한층 더 높아졌다. 그간 읽고 싶었으나 이미 절판되어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박완서님의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를 찾아내곤 마음 속으로 '심봤다'를 외쳤다. 그때 그 시절의 친근한 도서로 다시금 영어공부에 불붙여 보고 싶어 찾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도 있다. 신이 나서 이것 저것 광주리에 담고 한 짐 메고 돌아와 오래 찾아온 책부터 펼쳐 보았다.

박완서님의 글은 내 젊은 날의 질풍노도를 다독여주곤 했다. 내게 있어 그녀의 글들은 다혈질적이고 성격이 급한 현실의 엄마 대신 차분하고 다감한 이상의 엄마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글들은 눈 보다 귀로 느껴지고 마음으로 감겨오는 깊은 속삭임이 되곤 한다.

책장을 몇 장 넘기다 보니 누군가가 끼워둔 낙엽이 눌려서 예쁘게 펼쳐져 있다. 적어도 20년은 넘겼을 듯한 세월의 흔적이 베어 있었다. 구하기가 어려운 책을 산 것도 기쁜 일인데,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나뭇잎 갈피가 내손으로 들어오자 빛 바랜 질감 마저 나의 추억이 되어 마음 속 깊이 담긴다. '누구를 위해 책갈피를 만들었을까? 혹시 알 수 없는 새주인을 위해 일부러 끼워 넣고 판 것은 아닐까?' 멋대로 상상하고는 좋은 선물을 받았다며 여기 저기 자랑을 늘어 놓았다.
'아, 그랬었다. 가을이 오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색색의 잎을 모아 두꺼운 책 사이에 넣어 말리곤 했었다.' 덕분에 잊었던 가을의 낭만이 고스란히 되새겨졌다.

주말에 공원에 나가 이 모양 저 모양의 낙엽들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돌아와 책장 안에서 먼지 쌓인 두꺼운 사전 한 권을 꺼내어 사이 사이 끼워 두었다.
곧 마른 잎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오겠지? 서걱서걱한 쓸쓸함이 가슴을 훑을 때 누군가 나뭇잎 책갈피 끼워진 책 한권을 손에 들고 내 마음의 온기를 느꼈으면...

가을은 독서의 계절,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아끼며 기억하는 계절이다.
잊었던 얼굴, 잊었던 놀이, 잊었던 이야기들을 다시금 들춰 꺼내어 보며 지나온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되새겨 봤으면 한다.

이 가을, 오랜 전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 들고,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어 놓고, 그리운 얼굴이 된 누군가의 손 편지들을 늘어놓고 가난한 마음을 부유한 추억으로 채워보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도 그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 되어주자.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