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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감독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리뷰] <남영동 1985>, 김근태의 수기 원작으로 한 정지영 감독의 야심작

12.11.29 12:06최종업데이트12.11.2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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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영동 1985>의 포스터 ⓒ 아우라 픽쳐스

"칠성대 위에 또다시 꽁꽁 묶여진 다음에 고문자들은 발바닥과 발등에 붕대 같은 것을 여러 겹 감았습니다. 새끼발가락과 그 다음 발가락 사이에 전기 접촉면을 끼우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고, 이 붕대도 전기담요처럼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발에, 사타구니에, 배에, 가슴에, 목에, 그리고 머리에 주전자로 물을 들어부었습니다. 그때 물의 선뜩함은 귀기(鬼氣)가 살갗에 달라붙는 바로 그것이었지요. 고문기술자는 뭔가 쉴 새 없이 떠들고 겁주고 협박을 했습니다. 이제 전기가 통하면 회음부가 터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 때문에 팬티를 벗겼다고 했습니다. 우선 물고문부터 시작했습니다."(김근태 저, <남영동> 64쪽, 2012년, 제5판 개정판, 중원문화)

영화 <남영동 1985>(정지영 감독)는 가족들과 동네목욕탕을 나서다 연행된 김종태(박원상 분, 김근태)가 경찰서에서 다시 눈이 가리워진 채 "끔찍한 비명,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비명"이 울려 퍼지는 남영동으로 끌려가 한 달여간 모진 일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다.

고문장면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끔찍했다. 영화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고문장면의 묘사가 몸서리처질 정도로 길기 때문이다.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던 고 김근태 의원이 직접 쓴 수기 <남영동>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영동 1985>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십분 발휘해 원작의 끔찍함을 적나라하게 증폭시켜 낸다.

김근태의 원작이 당시의 만행을 믿겨지지 않을 만큼 차분한 필치에 담아 고통을 한 자, 한 자 곱씹었다면, 정지영 감독의 영화는 치떨리는 격정적인 고문장면을 바로 눈앞에 생생하면서도 집요하게 재현해낸다.

감독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2대 의장으로 활동했던 당시 김근태의 생각과 공안기관의 의도 또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김종태와 '사장'(총경, 문성근 분)과의 대화 속에 녹여낸다. '사장'은 자신이 김종태의 고등학교 선배임을 밝히며 자신의 직원들이 "좀 심하게 했던 것 같다"며 다소 신사적인 척하며 등장한 뒤 솔직하게, 편하게 얘기하라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대화를 이끌어가려 한다.

"배후가 누구냐?"

"그것 보세요. 북괴하고 주장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남북이 대치된 상태에서 이 정도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국정운영의 효율성이 담보돼야 합니다. 그 효율성을 위해서 조금 불편한 건 참아야지요. 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계셨기 때문에 지난 십수 년 동안 대한민국 경제가 북괴보다 열 배 이상 성장한 것 인정하시죠?"

"네, 언제나 똑같은 논리였습니다. 5·18민중항쟁 당시에도 당국은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그건 당국의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아니, 오히려 당시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미 문화원 점거농성도 그래서 일어난 것이구요. 거기에 빨갱이가 어디 있고, 북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까?"

"그 주장을 널리 알리는 게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주요활동목표였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관뒀어요?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다가 관뒀을 때는 뭔가 다른 계획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아니요, 그냥 쉬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네, 그 이것저것! 그 얘길 해달라는 겁니다."

'사장'도, '전무'(경정, 명계남 분)도 모두 눈빛을 반짝이며 김종태가 별 의미 없이 던진 "이것저것"이라는 표현에 미리 준비된 소설을 꿰맞추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경기도 경찰청 소속으로 전국 출장을 다니는 고문기술자 '장의사' 이두한(이경영 분)을 부르게 된다.

정지영 감독은 영화에서 두 가지 소리로 관객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데, 하나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형상화한 이두한의 태연한 휘파람 소리. 다른 하나는 원작에서도 언급된 멀리서 들리는 기차 소리와 기적 소리이다.

먼저 휘파람 소리는 밀폐된 공간에서 울리는 귀를 자극하는 진동이, 곧 있을 끔찍한 고문을 예고하며 긴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다하지만, 조금 빈번하게 들려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휘파람 소리의 학습효과

민청련 의장으로 활동하던 김종태는 19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 아우라 픽쳐스


"밤이 늦으면 기차 바퀴 소리가 들리고 기적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습니다. 이건 당시 본인에게는 큰 위안이었습니다. 바깥 세계를 그 기적 소리에서, 기차 바퀴 소리에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나를 밖의 세계와 연결시키는 끈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기적 소리는 나를 실어서, 내 영혼을 담아서 어린 시절 행복했던 그 시절로 되돌려 보내주곤 했었지요."(위 책 46쪽)

원작에서 언급된 기차 소리와 기적 소리는 남영동 대공분실 옆으로 용산과 서울역을 연결하는 기찻길에서 들려오던 소리였는데, 김근태는 "잠시의 회상에 불과한 것"이었고 회상에서 깨어나면 "나는 더욱 왜소해져 갔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소리들은 햇빛마저 거의 차단된 어두운 공간에서 자신이 처한 믿기 어려운 비현실적 상황이 환상이 아닌 명백한 현실임을 각성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이 소리들은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의도된 곳에 배치되었지만 다소 모호하게 귓가를 맴돌아 역시 아쉬움을 남긴다. 음산한 대공분실의 공기를 흩뜨리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발버둥치는 파리를 비추는 장면은, 오히려 일부 장면에서 보인 CG 표현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차 소리의 아쉬움을 충분히 덮고도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시간이 흘러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어 국무회의에 참석한 김종태와 대통령이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감독은 표현의 자유가 심히 위축되어 최근 폭넓은 공론의 장으로 쉽사리 나오지 못했던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꺼내드는 용기를 보여준다.

물론 4대 개혁입법 중 하나로 국회 과반의석을 등에 업고도 국가보안법의 단 한 글자도 고치지 못했던 전임정부의 한계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중영화 속에서의 이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이는 분명 전작 <부러진 화살>에서 정지영 감독이 보여준 사법부와 권력에 대한 날선 비판에 대한 진일보라 할만 하다.

감독은 고문 이전의 이야기마저도 고문실 안에서의 회상으로 몰아넣는 등, 영화의 거의 모든 설정을 대공분실이라는 다소 비현실적 공간에서 풀어냈다. 특이한 점은 무려 27년 전의 곰팡내 날 것 같은 밀실에서의 인두겁을 쓴 악마들이 벌이는 살육의 모습이 오래된 현재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작년 12월 김근태는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지만,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휘했던 '윗선'과 당시 신군부의 책임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어찌보면 말단 집행자에 불과했던 이근안이 형기를 마치고 나와 목사가 된 뒤,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심문기술자"라며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하고 "당시 전기고문의 실체는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비행기 모터에서 뺀 AA건전지 2개라는 점이다", "손가락만한 건전지 2개가 전부인데 어떻게 전압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공개적으로 떠들 수 있는 게 30년 가까이 지난 21세기 한국의 현실이다.

<남영동 1985>, 27년 전이 아닌 현재진행형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고통으로 이제 육체적 고문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했던 국가보안법은 아직 서슬 퍼런 광기를 내뿜으며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국가임을 마음껏 조롱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의 대법원 판결마저도 무시하는 등 유신체제를 애틋한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이가 유력 대통령 후보가 되는 현실. 대선을 불과 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개봉된 영화 <남영동 1985>는 상영시간 106분 내내 의도된 불편한 고통을 선사한다.

이는 27년 전 김근태가 22일간 겪었던 것과는, 다른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이 겪었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 또렷한 대답을 이끌어내기에는 충분하다.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인터넷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남영동 1985 정지영 김근태 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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