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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위원 가슴 벌벌 떨게 만든 전설의 고문서

[한국의 유물유적]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족 사랑이 담긴 '하피첩' ②

등록 2024.05.11 10:38수정 2024.05.1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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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유적지에 세워진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의 동상 ⓒ 경기문화재단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이 강진 유배지에서 저술한 500여 권 저서 중에서 으뜸은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서 <목민심서>. 억울한 백성들이 없도록 하게 하는 형옥에 관한 형법서 <흠흠신서>.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게 하려는 <경세유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대학자 이전에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다산의 따뜻한 '부부애와 자식사랑'이 담긴 '하피첩(霞帔帖)' 또한 이에 못지않은 저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19세기 한 사대부 가문의 '가족사랑'을 엿볼 수 있는 하피첩이 오늘날 우리에게 찐한 울림을 주는 유산으로 전해지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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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전 하는 3권의 하피첩에는 다산이 두 아들에게 전하는 26편의 편지글이 담겼다. 각 첩에는 하피첩을 만든 경위를 다양한 서체로 적은 서문이 있다 ⓒ 국립민속박물관

 
1810년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온 지 10년째. 고향을 떠나올 때 19살, 16살이던 장남 학연(丁學淵 1783~1859)과 둘째 학유(丁學游 1786~1855)가 어느덧 28살과 25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유배생활 중 다산이 가장 염려한 것은, 혹시라도 두 아들이 '폐족(廢族)'이라는 굴레를 쓰고 엇나가지 않을까 하는 것. 다산은 늘 노심초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걱정한 다산은 3년 전 아내가 보내온 빛바랜 치막자락을 잘라 두 아들에게 서릿발 같은 훈계와 교훈이 담긴 4권의 서첩을 만들어 고향으로 보냈다. 1첩에는 '가족공동체'와 결속하여 소양을 기르고 2첩에는 자아를 확립하고 몸과 마음을 닦아 '근검'하게 살며 3첩에는 '학문과 처세술'을 익혀 훗날에 대비하라는 가르침을 적었다.

맨 먼저 큼지막하게 쓴 '경직의방(敬直義方)' 네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글자 옆에 붉은 동그라미 표시까지 해두었다. "공경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로써 행동을 반듯하게 하라"는 아버지의 추상같은 훈계에 두 아들은 서늘함마저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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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의방(敬直義方). “공경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로써 행동을 반듯하게 하라”는 아버지 다산의 추상같은 가르침이다. 글자옆에 붉은 동그라미표시를 해놓았다 ⓒ 국립민속박물관

           
근검(勤儉)이라는 두 글자도 눈에 띈다. '나는 벼슬이 없어 물려줄 전답이 없다. 그러나 근면과 검소는 비옥한 토지보다 나아서, 한평생 쓰고도 남는다. 그러니 근검 이 두 글자를 부디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상 어디에 이보다 값진 가르침과 사랑이 있을까. 유배 간 아버지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행서와 행초서 전서와 예서 등 다양한 서체로 쓴 하피첩을 받아 든 두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 다산의 간절함과 진심은 두 아들에게 통했다.

죄인 자식들이라 정상적인 출세길은 막혀 있었지만, 장남 학연은 아버지의 강진 제자들과 남종 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등과 교유하며 <삼창관집>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둘째 학유는 한 해 동안 농가에서 힘써야 할 일을 월별로 정리한 국한문 운문체의 가사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다산이 그토록 걱정한 '폐족' 신세는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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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벼슬이 없어 물려줄 전답이 없다. 그러나 ‘근면과 검소’는 비옥한 토지보다 나아서 한평생 쓰고도 남는다. 그러니 ‘근검’ 두 글자를 부디 소홀히 여기지 말라”라고 두 아들에게 당부한다. 근자와 검자 옆에 붉은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 국립민속박물관

                     
폐지 줍는 할머니 손수레에서 발견된 하피첩
     
다산의 가족 사랑이 담긴 하피첩은 다산의 삶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여정을 겪는다. 시집간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는 사위 윤창모의 집안을 거쳐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들어갔고, 하피첩은 후손들에 의해 다산의 생가인 경기도 남양주의 '여유당(與猶堂)'에 보관되어 대대로 가보로 전해졌다. 

그러던 중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5년 을축년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자리한 여유당에도 물이 쓰나미처럼 차올랐다. 다산의 4대손은 죽음을 무릅쓰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하피첩과 서책이 들어 있는 궤짝을 짊어지고 겨우 피신했다. 밤새 내린 비에 여유당은 결국 통째로 쓸려갔다.


가까스로 을축년 대홍수 위기를 면한 하피첩은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이번엔 6·25 전쟁이다. 여유당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던 4대손이 작고한 뒤 하피첩은 5대손에게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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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국가 보물로 지정된 정약용 필적 하피첩. 6.25 전쟁 중 잃어버린 4권의 하피첩 중에서 3권이 2004년 수원의 공사장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되었다. 1첩과 2첩은 표지가 미색, 3첩은 푸른색이다 ⓒ 국립민속박물관

 
5대손은 경제적 이유로 1930년대 초 마재마을을 떠나 서울로 상경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던 중에 6·25가 터졌다. 인민군들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5대손은 하피첩 보따리를 소중하게 챙겨 수원역으로 나갔다.

수원역은 피란 인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다리던 기차는 오지 않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붐비는 인파들 사이에서 하피첩을 잃어버렸다. 5대손은 "내가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 하피첩을 잃어버렸다. 하늘에 가서도 조상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라고 여러 번 자책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피첩은 기록에는 존재하지만 실물로는 볼 수 없는 전설의 유물이 되었다. 그러던 중 2004년 수원의 한 인테리어 공사장에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공사 중에 뜯어낸 벽지와 폐지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할머니가 폐지를 줍고 있는데, 인테리어업체 현장 소장 이모씨의 눈에 할머니의 손수레 바닥에 깔려있는 세 권의 고문서가 눈에 들어왔단다. 내용은 잘 모르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책이라 생각한 이씨는 할머니에게 "폐지를 내어 줄 테니 고문서를 달라"라고 했고, 그렇게 세 권의 서첩을 손에 넣었다. 4권의 하피첩 중 3권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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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KBS TV쇼 진품명품에 하피첩이 나왔다. 김영복 감정위원은 감정가로 1억 원을 제시했다 ⓒ 국립민속박물관

   
TV쇼 <진품명품> 거쳐 국가 보물로 지정
 

그로부터 2년 뒤 2006년 고문서의 내용이 궁금했던 인테리어 업체 소장 이씨는 고미술품을 감정하고 평가하는 KBS 교양프로그램 <진품명품>의 문을 두드렸다. 먼저 사진으로 살펴본 김영복 고서화 전문 감정위원은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전설의 하피첩이었기 때문(이는 당시 <진품명품>을 진행했던 왕종근 아나운서가 방송에 나와 후일담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우선 진위 확인이 필요했다. 다산이 하피첩을 만들고 남겨둔 아내의 치맛자락으로 시집간 딸에게 그려준 '매조도'가 고려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었기에 확인이 가능했다. 매조도의 천과 하피첩의 비단 천을 정밀 분석한 결과 천의 재질과 낡은 정도 등이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게 200여 년 만에 하피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2005년부터 진품명품에 출연하며 고서화를 감정했던 김영복 위원은 서첩을 보는 순간 "가슴이 벌벌 떨렸다"며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은 다산의 하피첩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감정위원단에서는 감정가로 1억 원을 제시했다. 감정가 15만 원을 예상했던 의뢰인 이씨 또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손이 떨려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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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10여 년간 머문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들었다 ⓒ 문화재청

   
그리고 몇 달 뒤 사업자금이 부족해진 이씨는 하피첩을 팔 생각으로 김영복 위원에게 연락했다. 중요한 문화재가 개인에게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김 위원은 다산이 유배생활 했던 강진군이 매입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먼저 강진군과 논의하라고 조언했다.

강진군과 이씨 사이에 몇 차례 협의가 있었으나 가격 차이로 거래는 깨졌다. 재정이 넉넉지 않은 강진군에서 거액의 문화재 구입 예산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 위원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부산저축은행의 대표 김민영 회장에게 알렸고, 얼마 뒤 하피첩은 김민영 씨에게 넘어가게 된다.

문화재 애호가 김민영은 고서화 분야에서 유명한 컬렉터로 이름이 자자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보물급 문화유산 또한 다수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구입한 하피첩은 다른 유명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2010년 10월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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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하피첩을 쓴 다산초당의 동암 ⓒ 문화재청

 
그러던 중 2011년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부산저축은행의 횡령 및 부실 대출 사건이 터졌다. 하피첩을 비롯해 김민영이 소유했던 문화유산들이 검찰과 언론을 통해 보도되며 다시 세간에 등장했다. 그가 소유한 문화재들은 모두 예금보험공사 채권단에 압류됐다. 하피첩을 포함해 보물급 문화재만 17건이었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겪은 하피첩은 2015년 9월 서울 옥션 경매에 부쳐졌다. 당시 경매에선 문화재의 특성과 가치를 고려하여 다시 개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입찰 자격을 공공기관으로만 제한했다. 경매에 응한 기관은 국립민속박물관과 남양주 실학박물관 등 국내 유수의 박물관이었다. 경매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하피첩'은 시초가 2억 5천만 원에서 출발했다.

서울 옥션의 예상가 4억 원을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은 하피첩은 끝까지 경쟁하던 국립민속박물관과 남양주 실학박물관 사이에서 7억 5천만 원을 부른 '국립민속박물관'의 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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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서울 옥션 경매에 부쳐진 하피첩은 7억 5천만 원을 써낸 국립민속박물관이 낙찰받았다 ⓒ 국립민속박물관

 
일각에서는 하피첩이 다산의 고향인 남양주 실학박물관으로 귀향하지 못한 게 다소 안타깝다고들 한다. 그러나 6·25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던 하피첩이, 다산의 삶만큼 드라마틱한 여정을 거쳐 국민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은 아닐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귀향하지 못한 하피첩 1권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 나머지 한 권도 빠른 시일 내에 고난의 시간을 끝내고 온전하게 돌아와 하피첩의 '완전체'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143호에도 실립니다
#하피첩 #다산정약용 #노을빛치마 #경직의방 #매화병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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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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