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9 13:57최종 업데이트 20.06.1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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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위한 선언 6월 16일 파리시장 안 이달고가 내놓은 향후 6년간의 시정 계획 ⓒ ville de Paris

 
지난 14일 일요일(현지시간), 프랑스인들은 코로나19 발병 이후 네 번째로 마크롱 대통령의 TV 연설을 들었다. "아직 행복한 날은 오진 않았지만, 그 비슷한 모습에 다가가고 있다"며, 오늘의 상황을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거둔 '첫 승리'라는 말로 자축하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과장돼 보였다. 중환자실 입원 환자 수는 3개월 전 7천 명에서 869명으로 줄어들었으나, 300명 안팎의 일일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승리'란 단어는 아직 먼 얘기였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일제히 마크롱의 부적절한 자축을 냉랭한 어조로 보도했다. 이틀 뒤, 임금 인상과 공공의료 예산 확대 약속을 여전히 이행하지 않는 정부를 성토하는 의료진들의 격렬한 시위 현장, 그리고 마크롱이 말한 '첫 승리'를 가져다준 그 전사들을 향해 최루탄을 퍼붓는 경찰의 행위가 프랑스 전역에서 목격됐다.


경찰에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는 의료진의 모습은 승리의 기쁨을 연기하는 마크롱 앞에서 모두가 불편했던 이유를 잘 증명해주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가야 할 길을 말하는 모든 목소리는 녹색과 공공성 강화를 지목하고 있건만, 마크롱 정부는 아직도 모진 매를 덜 맞았다는 표정이다.

다행히도 온 세상이 코로나 환란이 주는 메시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니었다. 6월 28일 2차 결선투표를 앞두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파리시의 안 이달고(Anne Hidalgo) 시장은 이번에도 녹색당과 연합해 2차 선거에 나선다. 
 

파리시장 후보인 사회당 앤 이달고가 녹색당 후보와 함께 지난 2일 파리 시내 선거 캠페인 중 취재진을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1차에서 지지율 30%를 확보하고, 10%를 얻은 녹색당의 다비드 벨리야르(David Belliard)와 연합하며 승기를 굳힌 이달고 시장은 '에콜로지', '연대', '건강'을 향후 6년간의 파리 시정을 결정짓는 키워드로 제시하면서 향후 시정 플랜을 지난 16일 발표했다.

"우리를 위협하는 위기에 맞서기 위해, 사회적 정의와 환경 보호는 모든 정책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경제적 효율성을 이유로 에콜로지(생태)에 대한 야심을 포기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도시가 회복될수록 우리의 건강 또한 잘 지켜질 수 있다. 따라서 에콜로지는 그 어느 때보다 미래를 위한 가치의 중심에 놓일 것이다."

향후 6년간의 시정 플랜 '파리를 위한 선언(Le manifeste pour Paris)'의 포문을 열면서 이달고 시장이 한 말이다.

그린 뉴딜이 마치 시대적 당위처럼 회자되고 있으나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못하고 있는 지금, 파리시장이 이번에 내놓은 플랜 중 주목할 만한 내용을 소개한다.
     
① 파리 전역 운행속도 30km/h 제한 

사회당 출신이지만, 지난 6년간 이달고 시장은 전무후무한 녹색 시장의 이미지로 각인돼 왔다. 그는 운전자들에겐 마녀 같은 존재였다. 자동차 도로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보행자도로와 자전거전용도로를 넓히느라 도로 곳곳이 늘 공사 중이었고, 교통체증은 일상이었다. 시민들은 투덜댔지만, 차기 시장 1위 후보의 자리에서 그는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었다.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그가 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파리시가 벌여온 자동차와의 전쟁은 가속화된다. 외곽순환도로와 일부 초대형 도로를 제외한 전체 파리 시내의 주행속도는 30km/h로 제한된다. 차량 속도를 줄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복합적이다. 차량 속도가 줄어드니 안전사고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지난해 시민 6천여 명이 차량 사고로 부상을 당했다. 어차피 차를 타도 빨리 갈 수 없으니,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대기 오염 축소는 당연히 이어질 테고, 공기질 향상은 시민 건강을 증진시킬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뿐 아니라 도시 소음도 줄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한 이동통제 기간에 파리 시내 도시 소음은 90%나 줄어들었다. 시민들은 비로소 새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고, 더 깊고 평안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 도시에 공존하는 동물들도 평화를 누렸을 터이다. 파리시는 속도뿐 아니라 소음 측정기까지 갖춘 기기를 통해 도시에 과도한 소음공해를 방출하는 운전자에게 벌금을 물리기로 한다. 디젤차는 2024년까지 전면 퇴출당한다.

② 3대 건설 계획 백지화, 제3의 숲 조성

언제나 첨예한 정치적 지향점들이 맞부딪히며 가장 극적인 결과가 드러날 수 있는 분야가 도시계획이다. 좌파 정치인들은 더 많은 사회임대주택의 건설을,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더 상업화된 도시의 면모를 드높이기 위해 대형빌딩 건설을 희망한다.

21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 중인 녹색당은 이 모두를 거부한다. 그들의 선택은 "더 이상의 콘크리트는 사양"이다. 안 이달고는 녹색당의 이러한 제안을 수용했다.

파리 12구의 베르시-샤랑통 지역, 10헥타르(ha) 부지에 마천루 6개를 건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파리시는 가지고 있었으나, 이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대신 파리에 있는 불로뉴, 뱅센 숲에 이어, 세 번째 숲 조성을 제안한다. 그 밖에 11구와 18구에 계획돼 있던 건설 프로젝트도 백지화하기로 했다. 거기서 무엇을 하든, 녹색 공간을 넉넉히 확보한다는 원칙만 확인한 채. 
 

Paris 2050 이미 2015년에 이달고 시장은 미래의 녹색도시 파리의 모습을 청사진으로 내놓은 바 있다. ⓒ ville de Paris

   
③ 주차장 면적 절반 축소, 도시 전체를 정원으로
 

향후 6년 동안 파리 시내 주차장들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우선, 오염이 높게 측정되는 지역의 300개 학교 인근 주차장부터 사라질 예정이다. 대신 그 자리에 보행자를 위한 길이 넓게 확보되고, 자전거전용도로가 깔리며, 17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진다. 자동차와 마주치지 않고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도록, 나무와 꽃들이 심어진 보행자 길이 공원들과 연결되도록 한다.

코로나19 이동 통제 기간에, 사람 간 접촉을 최소화하고 자전거 이동을 최대한 권유하기 위해 급히 확보된 자전거 도로는 이동 통제가 해제된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파리 전역을 오직 자전거로만 이동할 수 있도록, 자전거전용도로를 도시 전체로 확대하는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된다.

④ 생태기후적 지역도시계획(PLU: Plan local Urbanisation)
 

파리에 지어지는 모든 건물들이 준수해야 하는 생태기후적 건축 기준이 만들어진다. 사용되는 건축자재, 기존에 있던 자연환경과의 조화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마련되며, 지어지는 콘크리트 건물과 같은 면적의 녹색 공간을 조성해야 하는 의무가 건축주에게 주어진다.

건설을 위해 훼손하게 되는 식물, 야생동물과 그들이 생존할 터에 대해서는 보존방법도 건설사에서 제시해야 한다. 친환경 건축자재, 신축보다는 리모델링에 건축에 대한 우선권이 주어진다. 모든 공공건물은 저녁과 주말, 지역 사회를 위해 또 다른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개방돼야 한다는 공생과 협력의 원칙도 새로운 도시계획 안에 삽입된 가치다.
     
⑤ 디지털 광고판 퇴출 
 

그 자체로 과다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디지털 광고판들이 모든 공공장소에서 사라질 예정이다. 과소비를 조장하는 현란한 광고들을 공공 장소에서 없애고자 하나, 파리시 재정의 한 축을 구성하는 광고비 예산을 포기할 수 없어 가장 덜 윤리적인 광고부터 철퇴를 내리기로 한 것이다. 더불어 성차별적이고, 반환경적인 모든 광고도 공공장소에서 퇴출된다.
     
⑥ 에어비앤비 주택 사들여 저렴한 공공임대
 

프랑스는 미국 다음으로 큰 에어비앤비(Airbnb, 공유숙박 플랫폼) 시장이다. 인구 200만 도시의 파리에서 7만 개에 이르는 집들이 에어비앤비 시장에 올라오며, 파리 도심은 점점 주민들이 접근하기 힘든 에어비앤비의 천국이 되어갔다. 이달고 시장은 한때 '파리 내 에어비앤비 금지' '에어비앤비 주민 찬반투표'를 검토한 적이 있다. 그만큼 에어비앤비는 파리의 주거 환경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인이었고 이를 둘러싼 시민들의 불만도 거셌다.

그러나, 다시 한번 코로나19는 선택을 쉽게 만들어주는 해결사 노릇을 한다. 지난 4개월간 관광객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한 많은 에어비앤비 소유주들이 운영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시는 이들을 사들여 저렴한 비용으로 일반적인 월세 임대를 하기로 했다. 향후 6년간, 200억 유로(약 26조 원)가 이 사업에 투여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2025년까지 서민을 위한 사회임대주택의 비율을 25%까지 끌어올리고, 정기 급여가 없는 예술가들을 위한 집세 보증 지원을 시에서 제공하기로 했다. 사회임대주택도 건설이 아니라, 기존의 사무실이나 주거 건물을 사들여 리모델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파리 시내 전경 ⓒ flickr

 
⑦ 파리시민의 식량주권 확보

파리시는 또 다른 보건 위기에 대비해, 파리 시내와 파리 외곽지역 농가의 유기농산물 공급체계를 통해 식량 주권을 확보하기로 한다. 프랑스 전체의 식량 자급률은 130%를 상회하지만, 파리를 포함한 수도권 지역의 자급률은 현재 10%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도권 면적의 49%가 농토인 까닭에 지역 농산물을 통한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2012년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도심 내 공공건물 옥상 농장이 성공적으로 확대된 결과, 1만4000m²에 이르는 유럽 최대 규모의 옥상농장 파리 엑스포 포르트 드 베르사유(Porte de Versailles)를 비롯해, 2000m²의 오페라 바스티유 옥상 농장 등 도시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파리시는 금년 내로 도시의 옥상 농장 규모가 100ha에 이르게 될 것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참여예산제를 통해 시민들이 주도하는 자발적인 옥상 농장화 사업을 지원할 예정이다.

"최대한 대안적인 가축 사육" 또한 지원할 계획이다.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옮겨지는 전염병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가축과 야생 동물이 살아갈 건강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공장식 축산은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위험요소"라는 게 이달고 시장의 문제의식이다.

더 나아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16%가 축산 과정에서 배출되므로, 육식을 축소하고 채식이 최대한 다양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파리시가 관할하는 학교 급식을 비롯한 모든 공공기관의 급식소에서 더 많은 채식식단이 제공될 수 있도록 한다. 건강한 식재료가 직거래 될 수 있는 사회적 기업 형태의 유기농 유통망의 확대도 도울 계획이다.

⑧ 새로운 연대의 창조

코로나로 인한 이동 통제 시기에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던 시민들끼리의 상부상조 행동과 모임을 정례화하고, 시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20개 구마다 '연대 센터(Fabrique de la solidarité)'가 설치된다. 더 이상 우연한 선의에 기대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 낙오되는 시민이 없도록 시가 나서서 협력의 틀을 제공한다.

그 밖에 이달고 시장은 ▲ 국가에 귀속돼 있는 의료행정의 권한을 시가 확보 ▲ 24시간 연중 운영되는 보건소 설치 ▲ 시청 내 의료국 신설 ▲ 공공의료 체계 관리 등을 주요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1세기 전 콘크리트 바닥 밑으로 사라져간 세느강의 지류, 라 비예브르강(la Bièvre)의 복개"도 녹색 도시 파리가 계획하고 있는 야심찬 프로젝트 중 하나다. 코로나 전후로 치러지게 되는 1차, 2차 투표 사이에 파리시의 시정은 역병의 위기가 주는 교훈을 온전히 흡수하며 또렷한 방향성을 획득한다.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은 공중 보건을 지키기 위한 투쟁인 동시에 사회적 정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기후위기와 생태 다양성의 붕괴는 바로 시민들의 건강에 극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작금의 역병이 주는 위기는 불평등을 증폭시킨다. 탄소배출에 가장 덜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 가장 심각하게 이러한 위기에 노출되고, 고통을 겪는다. 이 시기를 가장 현명하게 극복하는 방법은 연대의 힘이 작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불평등과 기후, 생태계는 하나로 연결된 문제이며, 그것에 맞서는 방법인 에콜로지와 연대도 결국 하나의 생각임을 이달고 시장은 강조한다.

말과 행동, 어제의 발표와 오늘의 행동이 계속 분리되는 마크롱 리더십은 30%를 밑도는 처참한 지지율로 불안하게 지탱되고 있다. 오는 28일, 3개월간 미뤄져 왔던 지자체장 결선 투표가 프랑스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퍼즐 조각을 완성할 터이다. 대만과 아이슬란드, 독일, 뉴질랜드의 위기 속에서 빛난 여성 리더십이 파리에서도 입증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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