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2 07:41최종 업데이트 20.07.03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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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의회에서 공화당 상원의원 주례 오찬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발언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복용 중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빚은 것과 관련, 이 약의 평판이 좋고 추가적 안전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 연합뉴스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시대의 한 풍속도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대미문의 세계 최고 권력자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일까? 언론이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 의학적 조언까지 하는 시대다.

대통령에게 의학적 조언을 할 사람이 기자여서도 안 되고, 기자 역시 의학적 조언보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 물론 대통령의 건강 문제는 어느 국가안보 사안 못지않기 때문에 매우 정치적이다. 그래도 의학적 조언은 의학 전문가의 몫이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 역할 분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인 그의 언행이 주는 파장은 너무나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코로나19에 맞서 "주사로 (살균제를) 몸 안에 집어넣거나 소독하는 방법은 없겠는가? 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확인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발언 이후 미국 일리노이주, 뉴욕주 등에서 표백제나 살균제 등으로 인한 안전사고 접수가 예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현지 관리가 '아동 보호를 위해' 희석된 표백제를 해안에 살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통령의 입은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보여주는 일들이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입이 다른 문제로 화제다. 내뱉은 말이 아닌 삼킨 약 때문이다. 현지 시간으로 18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코로나19에 대비해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클로로퀸)을 매일 복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입
     
트럼프 대통령의 클로로퀸 사랑은 이미 잘 알려진 일. 지난 3월 16일 보수성향 폭스뉴스에 출연한 의사 마크 시겔이 한국에서 이미 시도됐다며 그 효능(?)을 주장한 이후 클로로퀸은 미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19일 트럼프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하더니 21일에는 '신의 선물', '게임 체인저'라며 클로로퀸의 효능을 극찬했다.

특정 의약품에 대한 대통령의 이례적인 찬사가 이어지자 그가 관련 회사나 주식을 보유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고, 트럼프 대통령이 관련 사실을 직접 부인하는 일까지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클로로퀸 찬양은 21일 미국 보훈처가 '클로로퀸을 투입한 환자군의 사망률이 투입하지 않은 환자군의 것보다 높다'고 발표한 후 잦아드는 듯했다. 그러다 이달 18일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은 일주일 넘게 이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고 기자들에게 말하기에 이른다.

전 세계 언론이 들썩였다. 앞서 사례들처럼 미국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의약품 안전사고를 증가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3월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클로로퀸 사용권고 발언 후 미국 애리조나에서 클로로퀸 인산염을 복용한 60대 남성이 사망하고 부인이 중태에 빠진 일이 있었다. 이 부부는 심지어 어류용 클로로퀸을 복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보건전문매체 <데일리메디>는 지난 4월 1일 "코로나19 치료제 거론 전문의약품, 임의 복용 위험" 기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클로로퀸의 인터넷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잃을 게 무엇인가?"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하이드록시클로로퀸 ⓒ 연합뉴스


18일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클로로퀸을 복용해야 할 합리적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잃을 게 무엇인가"라고 힘주어 두 번 반복했다. 그러면서 "의료진도 임상에 앞서 약을 복용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라고 말한다"고도 했다

"잃을 게 무엇인가?" 트럼프 대통령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 2016년 대선 당시 흑인 커뮤니티를 향해 지지를 호소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이 표현을 수차례 반복했다. 2016년 8월 18일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가진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정권 하에서 얼마나 나빠졌는가 (…) 젊은 흑인의 58%가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이제는 바꿔야 할 때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할 때다. 그런다고 당신들이 잃을 게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당시 트럼프 후보에 대한 흑인 사회의 지지는 고작 2%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고자 개발한 트럼프의 논리는 '미국의 흑인 사회가 현재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 만큼 자신을 지지해 뭔가 변화를 시도한다면 더 나은 결과가 올 가능성은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현재 코로나19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만큼 비록 완전한 효능 증명이 안 됐을지라도 클로로퀸과 같은 약을 복용할 경우 '밑져야 본전' 아니냐는 논리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숙명적 방치는 '모든 경우가 잘못되는 결과'를 얻지만, 뭐라도 시도해 본다면 '못 돼야 본전, 잘 되면 호전'이라는 논리다. 얼핏 설득력 있어 보인다.

사전예방원칙
 

<폭스 뉴스>의 닐 카부토 앵커는 18일 클로로퀸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한 후 시청자를 향해 "만약 당신이 위험군에 속하고 코로나 예방책으로 클로로퀸을 복용한다면 그 약은 당신을 죽일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 폭스 뉴스

 
비슷한 논리로 '사전예방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커다란 잠재적 위기 앞에서, 비록 그 위기가 반드시 현실화된다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혹시 발생할 경우 그 피해가 불가역적이고 막대하다면 그에 대한 사전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원리다.

기후변화, 유전자 변형 식물 재배, 휴대전화의 전자파 등이 그 구체적 예다. 이런 사례들은 그 폐해가 완전히 증명되지 않았더라도 만약 폐해가 발생한다면 회복이 불가능하고, 결과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관련 산업을 무조건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정리한 원리다. 많은 서구 국가에서 중요시하는 원리고 일부 국가에서는 헌법적 가치까지 갖는다.

이 원리에서도 조치를 취할 경우 실제 위기가 오면 다행히 막을 수 있고, 설사 위기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으냐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잃을 게 무엇인가" 원리도 사전예방원칙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인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사전예방원칙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 조치 자체의 해악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조치가 오히려 기후변화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다른 분야의 체계를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면 그 조치는 선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치료 또는 예방을 위해 클로로퀸을 복용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와 달리 "잃을 것이 많을 수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약의 효과가 있고 그 증거가 "나"라며 설득을 시도하지만, 의약품의 부작용 가능성은 그 약품을 취했을 때 항상 발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친트럼프 매체인 <폭스 뉴스>마저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비과학적 자가 처방에 우려를 표하고 나섰다.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비판적 언론이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기행에 대해 "팬데믹 대응을 위해 화산재도 마실 수 있고, 소 또는 낙타의 오줌까지 마실 태세"라며 조롱하는 논조를 선보였다면 <폭스 뉴스>는 정말 트럼프 대통령이 걱정되어서 하는 충고인지도 모르겠다.

<폭스 뉴스>의 닐 카부토 앵커는 18일 클로로퀸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한 후 시청자를 향해 "만약 당신이 위험군에 속하고 코로나 예방책으로 클로로퀸을 복용한다면 그 약은 당신을 죽일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많은 경우, 위기는 그 직접적인 원인 때문에 상황이 심각해진다. 하지만 역시 많은 경우, 위기 앞에 선 인간의 비과학적 추론, 비합리적 판단, 비실증적 행위 때문에 심각해지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천재(天災)일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인간 때문에 빚어진 인재(人災)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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