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03 11:53최종 업데이트 19.10.03 11:53
'인사동'이라 불리는 상징적인 문화 보존 지역을 오게 되면 가장 많이 첫 걸음을 시작하는 기점이 '수운회관'이다. 수운회관은 1972년 천도교 교단에서 세운 16층 건물로, 천도교를 창시한 최제우의 호 '수운(水雲)'을 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교령인 최덕신이 박정희 대통령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 근처에서 가장 큰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본래 이곳은 천도교 본부와 천도교 문화관이 있었던 곳이다. 문화관은 1950년대에 일반인에게 임대되어 '문화극장'이라는 재개봉관이 되었는데 1970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운현궁 앞 개천이 복개되면서 이 건물들을 없애고 수운회관 건물을 세운 것이다. 이 건물의 이름인 '수운회관'이란 한글 글씨도 박정희가 쓴 글씨라고 한다.


그러나 수운회관이 유명했던 것은 새로 생긴 건물의 위용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건물의 안쪽에 자리 잡은 특별한 건물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한옥들이 많은 이 지역에 특이한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많은 눈길을 끌었다. 오랫동안 천도교의 교당으로 쓰이며 이미 이 지역의 중심이 되었던 역사적 건물이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축 비화
      

나카무라 요시헤이 '천도교 중앙대교당' ⓒ 황정수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세워지기 전에 천도교 본부는 경복궁 옆 송현동에 있었다. 그런데 일시에 교세가 확장되자 더 큰 교당의 필요성을 느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1918년 총회를 열어 새로운 교당을 짓기로 결의한다. 설계는 당시에 이름이 높았던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1880-1963)에게 맡겼고, 시공은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하게 되었다.

교당의 건축은 3.1운동으로 지체되었다가 1921년 2월이 되어서야 겨우 준공된다. 건물 구조는 화강석 기초에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단층구조로, 중간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 천장을 철근 앵글로 엮어 지붕을 덮었다. 그리고 전면에 2층 구조의 사무실을 붙여 짓고, 현관 위쪽을 바로크 풍 탑 모양으로 높이 쌓아올려 고풍스런 느낌을 주었다. 석재는 창신동 석산에서 채취하여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붉은 벽돌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천장 앵글철재 등 내부 장식에 필요한 자재는 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처음에 손병희는 400평 규모의 대규모 교당을 건립하려고 당국에 건축 허가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교당이 지나치게 크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허가를 내주지 않아 규모를 줄여 지었다. 이 건물의 총공사비는 22만원(사무실까지 27만원)이 필요하였는데, 교인 한 가정 당 10원을 기준으로 약 30만 원을 모금하여 충당하였다. 남은 성금은 3·1운동의 자금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 자금은 기독교 측의 자금과 함께 3.1독립운동 추진에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해방 후 상해에서 귀국한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는 "천도교가 없었다면 3·1운동이 없었고, 3·1운동이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임시정부도 없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이외다"라는 감사의 연설을 했을 정도로 손병희가 마련했던 천도교 자금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건물 주변에서는 많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출판문화운동의 상징인 '개벽사(開闢社)'가 있었고,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 "어린이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이 3.1독립선언문을 배부한 장소이기도 하다.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설계한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 與資平, 1880-1963)는 유능한 일본인 건축가였다. 그는 일본 여러 지역의 중요한 공공건물을 건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한국과 만주의 공공건물에도 많이 관여하였다. 그는 유럽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아카데미즘에 반발해 탄생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분리파 운동(Secession)'에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도쿄대학 건축학과 출신으로 한국과의 인연은 1907년 중구 태평로에 일본 제1은행 한국 총 지점을 착공할 때 공사 감독관으로 근무하며 시작된다. 이 건물은 후에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 '한국은행 본점'이 된다. 지금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08년부터는 아예 경성(서울)으로 이주하여 1912년 조선은행 본점이 준공되는 것을 본다. 이후 조선은행의 건축 고문을 맡고, 을지로에 건축사무소를 개설하며 점차 한국의 공공건물 건축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다.

조선은행,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차례로 지은 이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건물을 설계하였고, 덕수궁미술관 등 중요한 건물을 차례로 지었다. 또한 중국 다롄(大連)에도 건축사무소 출장소를 개설하고, 도쿄에는 나카무라공무소를 개설하여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가 일제강점기 가장 유능한 건축가 중 한 명이 된다.

조선은행(한국은행) 본관 건물

서울 중구 태평로에 있는 한국은행 본관 건물은 1912년 완공된 한국 최초의 은행이다. 이 건물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1854-1919)가 설계를 하였고,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공사 감독을 하였다. 다쓰노 긴고는 일본 도쿄역의 역사(驛舍) 건물을 설계한 최고 수준의 건축가였다. 경성역(서울역) 역사가 도쿄역 역사와 유사한데, 이것도 다쓰노 긴고의 수제자인 츠카모토 야스시(塚本靖)가 경성역을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좌우 대칭형 모습으로 설계되었다. 외벽은 화강암으로 하였고 지붕은 천도교 중앙대교당처럼 철골조를 이용하여 돔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건물로는 주변의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커 위압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 자본의 위력을 상징하는 권위적인 모습과 겹쳐진다. 한편으론 이러한 위압 속에서 살아야 했던 당시 한국 국민들의 아픔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선구적 양식으로 지은 중앙고등학교 동·서관
 

중앙고등학교 동, 서관 ⓒ 황정수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손길은 한국의 대표적인 학교 건물에도 닿아 있다. 1920년에는 숙명여고보 건물을 지었고,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의뢰로 계동으로 이사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건물도 설계하였다. 이 건물들은 이후 다른 학교의 건물을 짓는데 모범이 되는 유명한 건물이 되었다.

중앙고등학교 건물은 동관과 서관 두 동으로, 거의 같은 한 쌍의 건물로 되어 있다. 1921년에 서관이 먼저 지어지고, 동관은 두 해 뒤인 1923년에 완공되었다. 고딕 건축 양식을 단순화 한 설계로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상 2층 건물을 지었다. 학교 교사를 목적으로 설계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으며, 건물의 평면과 입면 형식은 동관, 서관이 거의 같다.

건물의 창문은 대부분 아치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돌출된 2층 창문은 위쪽이 뾰족한 모습이다. 아치들에는 회백색의 화강암을 끼워 넣어 붉은 벽돌로 통일된 외벽 면에 변화를 주었다. 지붕 쪽에는 환기와 채광 그리고 장식 효과를 위해 삼각형의 작은 돌출 창을 내었으며 굴뚝은 밖으로 노출하였다. 제국주의 침략이 학교에까지 미쳤다고 볼 수도 있으나, 건물만으로 보면 구석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신경을 써 아름다운 건축물이 되었다.

궁에 자리한 서양식 미술관, 덕수궁미술관

덕수궁미술관은 자주 덕수궁 석조전 건물과 혼동한다. 덕수궁 석조전은 1910년에 완공되었으며, 설계는 영국인 G.R.하딩과 로벨이 하였고, 이오니아식과 로코코풍이 혼용된 특이한 기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에 비해 덕수궁미술관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1938년에 미술 전시 공간을 목적으로 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하여 지은 것이다.

덕수궁미술관이 완공되자 석조전은 근대 일본미술 진열관으로 사용되었으며, 덕수궁미술관은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에서 전시하던 조선 고미술품들을 옮겨 전시할 공간으로 꾸며졌다. 공간의 성격은 달랐지만, 미술 전시라는 큰 틀에서 이왕가미술관의 형태가 완성된 것이다.

광복 후 이왕가미술관은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1973년에는 경복궁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 미술관으로 이전해 오기도 하였다. 이후 과천에 현대미술관이 생긴 후 199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조선은행 다렌 지점(1920), 펑톈(奉天) 지점(1920), 군산 지점(1923) 등 한국과 관련된 여러 건물을 짓는다.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건축물들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전면에 서는 불순한 건물들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한국 근대기 건축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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