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30 19:56최종 업데이트 19.07.08 17:32

상해 전경사진(1932년 1월 30일 치 동아일보) ⓒ 동아일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중국 상해 김신부로(현 서금이로)에서 탄생한다. 이후 광복을 맞는 1945년 8월까지 고난에 찬 항일투쟁이 전개된다. 두 번째 청사는 하비로(현 회해중로)에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건물 외벽에 대한민국 태극기가 당당히 내걸리기 시작한다.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상해를 떠나는 1932년 5월까지 12차례 옮겨 다닌다.

대한민국 100년 역사가 시작된 중국 상해. 이역만리 이곳은 일제강점기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의 조계지가 있는 동양 제일의 국제도시였다. 이처럼 세계열강들이 치외법권을 누리며 자유롭게 통상 거주하는 상해는 독립투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상해에는 다양한 계층의 많은 한국인이 살았으며 한인촌도 존재했다.
 

상해 한국인 업소들 신년광고(1926년 1월 7일 동아일보) ⓒ 동아일보

 
옛날신문(1910~1940년대)에 따르면 당시 상해에는 금문공사, 삼덕양행, 해송양행, 원창공사, 용금양행, 남방공사, 신정양행, 흥원공사, 삼신무역공사 등 크고 작은 무역회사 및 물류 업체가 수십 개 진출해 있었다. 고려인삼 전문 취급점인 금문공사를 비롯해 임성공사, 동신공사, 려여공사 등은 두 번째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하비로'에 위치하였다.

조선과 서양 물산을 함께 취급하는 합자회사를 비롯해 병원, 양복점, 순모 라사 직수입점, 서점, 미용 재료상, 사진 재료상, 여관, 택시회사, 제과점, 댄스홀, 한식당, 경양식집, 그리고 고급요릿집(명월관, 평양관 등) 상호도 보인다. 1939년 11월 당시 한국인 거주자는 5천여 명. 그에 따라 규모와 업종이 다양한 한국인 점포도 수백 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교민들이 주머니를 털어 세운 조선인 학교(仁成學校)도 있었다. 안창호, 여운형 등 임시정부 요인들 발의로 1922년 설립된 이 학교는 첫 번째 임시정부가 위치한 노만구 김신부로에서 개교, 노신부로, 홍강지로 등으로 옮겨 다니며 광복을 맞는다. 초기에는 여운형, 선우혁 등 임정 요인들이 초중등 수준의 교과목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거리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
 

상해 서금이로와 회해중로가 만나는 사거리 풍경 ⓒ 조종안

 
기자는 지난 1일부터 8일까지 7박 8일간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관련 기사 :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첫날(1일) 일정은 오전 10시쯤 상하이 푸둥 공항에 도착, 점심을 먹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 서금이로(西金二路)와 두 번째 청사가 있었던 회해중로(淮海中路) 거리를 거니는 것으로 시작했다.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설명은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남북으로 곧게 뻗은 서금이로에서 시작한 것은 분명한데 청사 위치, 즉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과 첫 업무를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어서였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는 신영전 교수 ⓒ 조종안


옛날 신문, 독립운동 기념관 등에서 봤던 1920~1930년대 상해 모습과 고층 건물이 빽빽한 지금의 거리 모습을 비교하고 상상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신영전 한양대학교 교수(임정로드 1기 탐방 단원)의 푸념 섞인 한마디가 가슴 한구석을 찡하게 했다.

"저희 아버지도 1933년경 이 거리 부근 한인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정확한 주소를 모릅니다. 동아일보 상해, 남경 특파원이었던 할아버지(신언준 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귀국하였고, 1938년 1월에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가 태어난 거리를 걸으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부자(父子)의 정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이별한 두 분이 참 안 됐다는 생각도 들고요."
 

신 교수는 "할아버지 신언준은 20대에 흥사단 간부로 도산 안창호 선생 비서와 임정 요인들이 세운 인성학교 학감을 지냈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국제 정세도 밝아 통역도 하셨고, 김구 선생을 도와 조선 청년들을 중앙군관학교에 입학시키는 임시정부 홍보요원 역할도 하셨다"라고 덧붙이며 사진과 기록으로만 만났던 할아버지 모습을 떠올렸다.

"저널리스트였던 할아버지는 마이너리티그룹에 관심이 많아 집창촌 등 하층민들 생활상을 글로 남겼습니다. 상해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이주자들과 독립투사들이 모여든 국제도시였죠. 그들이 노숙자처럼 거리를 배회하다가 쓰러져가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놓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동병상련'의 모습이었을 텐데요. 80~90년 전 아버지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거닐었던 거리라고 생각하니 온몸이 짜릿해지면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거사 직전 이봉창(왼쪽), 윤봉길 의사 모습. 두 의사의 선서 사진을 외국 언론사에 돌린 사람은 신언준 당시 동아일보 상해 특파원으로 알려진다. ⓒ 신영전

 
신 교수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에 찍은 선서 사진을 가장 먼저 외국 언론사들에 돌리고, 안창호 선생 체포 소식을 국내에 처음 알린 기자가 할아버지(신언준 기자)였다"라며 "할아버지는 잡지 <신동아>, <동광> 등에 '노신방문기(魯迅訪問記)', '만주(滿洲) 문제를 둘러싼 일미(日美) 외교전' 등 많은 취재기를 남겼다"라고 덧붙였다.

신언준 기자는 누구?

신언준(申彦俊:1904~1938)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1929년 8월부터 동아일보 상하이 특파원, 12월부터 남경 특파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오산학교 시절 3·1운동에 앞장서 참여하였고, 1920년대 초 상해로 건너가 항주 영문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오송 국립정치대학과 동오대학 법률과를 마친다. 중국 중앙일보(영자지) 논설위원, 상해 세계신문사 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26년 1월 <동아일보>에 글을 게재하였다.
 

신언준 특파원이 본사로 전송한 1931년 7월 7일 치 동아일보 기사(만보산 사건은 조선 농민과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다) ⓒ 조종안

 
"1925년을 보내고, 1926년을 새로이 맛는 이즈음에 당(當)하야 본지(本紙)는 특(特)히 만천하독자(滿天下讀者)의 신년(新年)의 의기(意氣)를 더 일층(一層) 고무경장(鼓舞更張)코저 내외(內外)의 일류명사(一流名士)를 강라(綱羅)하야서 각방면(各方面)에 긍(亘)한 논평(論評), 수상(隨想), 서사(叙事)의 모든 기사(記事)를 정선만재(精選滿載)하야 신세계창조(新世界創造)에 일대노력(一大努力))을 시(試)하려하오니..(아래 줄임)"
 

1925년 12월 30일 치 <동아일보>(1면) 예보 기사 앞 대목이다. 신문은 글 제목 <경제적(經濟的) 퇴패(頹敗)의 원인(原因) 대책(對策)> 필자를 '在(재) 上海(상해) 申彦俊(신언준)'이라 소개하고 있다. 신문에 소개된 일류명사(필진) 중 조병옥, 최남선, 윤백남, 이광수, 최두선, 김활란 등 낯익은 이름도 여럿 보인다.

안창호 선생을 보좌하던 신언준은 독립운동가들 추천으로 동아일보 상해, 남경 특파원이 된다. 이후 7년 동안(1929~1935)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 활동을 상세히 보도, 국내외에 항일 여론을 고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구 선생과 함께 중국 군사위원회와 교섭, 중앙군관학교를 통한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일제의 간계로 일어난 완바오산 사건(1931) 진상을 폭로, 한·중 간 민족충돌 확장을 막는 데 기여하였다.

신언준은 지병이 악화하여 귀국, 고향에서 요양하다가 1938년 1월 20일 유명을 달리한다. 당시 나이는 서른넷. 인생을 짧고 굵게 장식한 그에게 정부는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1998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신언준 선생이 독립운동 50년 만에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 포장을 받게 됐음을 알리는 1987년 9월 17일 치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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