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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1.16 10:03수정 2019.01.16 10:03
내 시간을 1996년 3월로 되돌리면 백화점 식품 매장에서 딸기를 팔고 있었을 것이다. 커다란 은색 대야 가득 딸기가 담겨 있었고, 고기 팔듯이 100g 단위로 팔았다. 손님이 주문하면 모종삽처럼 생긴 플라스틱 도구로 주문한 만큼 딸기가 그려진 촌스러운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았다. 

지금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만 대야 윗부분은 크고 실한데 반해 아래로 내려갈수록 작았다. 손님들은 큰 것만을 원했고, 판매 사원은 골고루 담으려다가 서로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옆에서 판매를 도와주고 있으면 진한 딸기 향에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 후 23년이 지났다. 1996년에 내가 팔았던 딸기와 2019년 1월에 맛본 딸기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많이 변했다. 품종과 판매 단위가 변했고, 나오는 시기는 당겨졌다. 1990년대의 여홍, 여봉에 이어 2000년대까지 육보, 장희 등 일본 품종이 딸기 시장을 좌지우지했다. 

국내 재배하는 딸기 십중팔구는 '설향'
 
딸기는, 아니 과일은 크기가 맛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만 보기에 좋냐, 선물하기 좋냐만 결정할 뿐이다.

딸기는, 아니 과일은 크기가 맛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만 보기에 좋냐, 선물하기 좋냐만 결정할 뿐이다. ⓒ 김진영

 
2002년, 정부가 국제식품신품종보호협약에 가입하면서 사달이 났다. 협약 가입 전에는 모종만 구입해 딸기를 재배하면 그만이었다. 협약 가입 후에는 모종을 구입할 때마다 일본 종자회사에 로열티를 지급해야 했다. 판매 가격을 올리면 그만이겠다 싶지만, 농사라는 게 종자를 뿌린 만큼 수확되는 게 아니거니와 모종 구입할 때 고정 비용이 100원이라도 올라가는 게 농민들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다. 

몇 만주 모종을 구입하려면 전보다 몇 백만 원을 더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부가 일본과 로열티를 협상하는 사이 '매향' 품종이 개발됐고, 이어 거북선이 왜구를 몰아내듯 일본 품종을 몰아낸 국내 육성 품종이 논산딸기시험장에서 개발됐다.

논산 3호가 태명, 정식으로 품종 등록할 때는 '설향'이라고 불렀다. 2019년 현재, 국내에서 재배하는 딸기 가운데 열에 여덟은 설향이다. 설향은 다른 품종보다 재배하기도 쉽거니와 수확도 많다. 맛은 장희, 육보, 레드펄 등 일본 품종보다 좋아 날마다 상한가다. 

경북 고령의 설향, 전남 담양의 매향, 경남 산청의 장희, 충남 논산의 금실 등 네 가지 딸기를 사와 딸 아이와 먹었다. 한 접시에 네 가지를 담고 품종은 이야기하지 않고 딸기를 먹으면서 가만히 지켜봤다. 세 가지는 별 말이 없다가 설향을 먹고 나서야 '맛있네'라며 한 마디 한다. 

2003년생인 딸이 딸기를 먹기 시작한 시기가 2006년도 즈음이니 익숙한 맛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당도와 씹는 맛, 향이 맛본 시점에서 세 가지보다 나았다. 품종의 우수성도 한몫 했겠지만 딸기를 딸 때의 기상조건, 밭의 컨디션도 품종만큼 딸기 맛에 영향을 끼친다. 

같은 품종이라도 재배 온도가 올라가면 익는 시기가 빨라져 색은 빨갛게 돌아도 당도, 향, 그리고 씹는 맛이 떨어진다. 서늘한 온도에서 천천히 키운 딸기가 당도나 식감이 좋다. 

한 알의 딸기를 내기 위해 농부는 14개월을 바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씨앗을 심고, 모종을 내고, 가을 초입에 정식으로 심는다. 경북 고령의 딸기 하우스 안은 천장 위로 흐르는 물소리와 딸기 따는 손길만 조용히, 빠르게 오간다. 간간히 하우스 한편에 있는 벌통과 딸기 꽃을 오가는 벌들이 눈길을 끈다. 

이중으로 지은 하우스 천장과 천장 사이에는 조금의 공간이 있다. 하우스 안에서 보는 첫 번째 천장 전체로 물이 흐른다. 지하수를 올려 흘리는 물로 수막을 만들어 보온한다. 외부 온도가 영하 4도임에도 하우스 내부 온도는 영상 8도다. 지하수가 부족한 곳은 보일러로 온도를 높인다.

하우스 농사와 재배법의 발전은 딸기의 출하 시기를 앞당겼다. 어릴 적에 딸기는 4월과 5월 사이에 먹는 과일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부천역 근처 딸기 농장을 봄철에 간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갔을 때는 딸기 출하가 2월로 당겨졌다. 

2019년 현재는 11월이면 딸기가 나온다. 2003년생인 내 딸은 딸기 제철을 12월로 알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세대에 따라 과일의 제철에 대한 인식도 바꿔놓았다. 

기술 발전은 딸기의 당도를 올리고, 저장 기간을 늘렸다. 그리고 한겨울에도 맛있는 딸기를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부족한 게 있다. 바로 딸기 향이다. 설향이든 매향이든 예전보다 단맛은 좋다. 하우스 재배로 온도를 맞출 수는 있어도 햇빛이 주는 향까지는 어찌하지 못한다.

과일은 크기가 맛을 결정하지 않는다
 
이중으로 지은 하우스 천장과 천장 사이에는 조금의 공간이 있다. 하우스 안에서 보는 첫 번째 천장 전체로 물이 흐른다. 지하수를 올려 흘리는 물로 수막을 만들어 보온한다. 외부 온도가 영하 4도임에도 하우스 내부 온도는 영상 8도다.

이중으로 지은 하우스 천장과 천장 사이에는 조금의 공간이 있다. 하우스 안에서 보는 첫 번째 천장 전체로 물이 흐른다. 지하수를 올려 흘리는 물로 수막을 만들어 보온한다. 외부 온도가 영하 4도임에도 하우스 내부 온도는 영상 8도다. ⓒ 김진영


양액(비료를 물에 녹인 것) 재배하는 딸기도 늘어나 향이 더 옅어진 딸기도 많아지고 있다. 몇 년 전, 일본의 양액 재배하는 딸기 농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하우스 입구에서 딴 딸기를 담을 수 있는 접시와 연유가 듬뿍 든 종지를 같이 내주었다. 

딸기 밭에 왜 연유?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따서 바로 베어 문 딸기에서는 어떤 맛도 나지 않았다. 연유를 준 까닭은 모자란 단맛을 연유로 채우라는 뜻이었다. 양액 재배하면 딸기 색이나 모양은 땅에서 재배하는 것과 같아도 맛까지 같지는 않다. 

모양과 형태는 다르지 않기에 가격도 같다. 소비자가 구별해서 구입해야 하나 골라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딸기 포장에는 재배법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딸기는, 아니 과일은 크기가 맛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만 보기에 좋냐, 선물하기 좋냐만 결정할 뿐이다. 경북 고령의 최영수 생산자와 친환경 과일을 유통하는 이원영 대표가 의기투합해 딸기를 크기로 선별하지 않고 유통한 적이 있다. 작은 것, 큰 것 가리지 않고 용기 중량에 맞추어 출하했다. 

과일을 크기로 선호하는 구매 심리, 그리고 크고 모양 예쁜 게 좋다고 방송에서 떠드는 얼치기 전문가들의 말들 속에서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농산물은 보기 좋다고 맛있는 게 아니다. 상처 난 것이나 모양이 삐뚤빼뚤한 것은 저렴하게 사서 먹으면 된다. 맛 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딸기를 큰 것만 선호하다 보니 작은 것들은 아주 저렴하게 가공공장으로 간다. 중간 것은 말 그대로 도매 값으로 수집상에게 넘긴다. 가공공장으로 가는 딸기가 많아지는 만큼 큰 딸기가 비싸진다. 큰 것만 찾는 바람에 같은 맛의 딸기를 비싸게 사먹고 있다. 

작은 고추가 맵다. 작은 것을 무시하다가 큰 코 다친다는 속담이 있다. 작은 딸기도 큰 것 못지 않게 달다. 현명한 소비자가 많아지면 농산물 가격은 그만큼 낮아진다.
 
2019년 현재, 국내에서 재배하는 딸기 가운데 열에 여덟은 설향이다.

2019년 현재, 국내에서 재배하는 딸기 가운데 열에 여덟은 설향이다.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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