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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9.20 18:37 수정 2020.09.21 12:39
박정희는 '딸 바보'로 유명했다. 다른 아빠들도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그는 정상적인 한도를 많이 넘어섰다. 박근혜와 최태민(최서연(순실) 아버지)의 비행을 중앙정보부·민정수석비서관실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보고받고도 최태민을 비호하는 박근혜를 끝내 어쩌지 못했다. 이는 그의 사후 38년 뒤에 박근혜 탄핵과 유신체제 잔존세력의 몰락을 부르는 원인이 됐다.
 
위험 요소를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철권 통치자 박정희의 모습은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1961년 5·16 쿠데타 당시의 윤보선 대통령이 그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방문 결과 보고 및 귀국 인사차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했다(1961. 11. 27.). ⓒ 국가기록원

 
박정희는 군사 정변으로 정부 및 군부의 질서를 일거에 뒤집고 국가권력의 최정점에 올라섰다. 하지만 윤보선과의 관계에서는 곤란을 겪거나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자주 나타났다. 박근혜처럼 윤보선도 박정희에게는 일종의 '천적'이었던 셈이다.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으로서 박정희 쿠데타를 추인해준 윤보선은 1979년 12·12 및 1980년 5·17 쿠데타 당시의 최규하 대통령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군부의 압박 때문에 마지못해 승인해줬다는 점에서는 최규하와 다를 바 없지만, 그런 외형적 상황만으로는 규정하기 힘든 점이 윤보선에게 있었다.

5.16 쿠데타 세력에 적극 협조
 
윤보선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30분에 '피신하시라'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냥 청와대에 머물렀다. 또 쿠데타 당시 박정희와 미국이 얼마나 교감을 나눴는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윤보선은 그날 오전 10시 18분에 '박정희를 제압하자'는 카터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 및 마셜 그린 주한미국대사 대리의 제안을 받고도 고개를 저었다. 쿠데타 세력과의 조우를 피하거나 쿠데타를 진압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3600명이라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병력으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사후 승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의 추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추인은 군부 장성들이 박정희에게 반격을 가하지 못하게 막는 법적 방어막이 됐다. 윤보선이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몸을 숨겼다면, 박정희는 쿠데타를 합법화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윤보선이 대통령직 사임 성명을 발표한 것은 쿠데타 10개월 뒤인 1962년 3월 22일이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표를 수리한 것은 이틀 뒤인 24일이다. 그 10개월 동안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의 정권 장악에 필요한 법적 조치를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뒷받침해줬다. 
 

육군 대장 계급장을 윤보선 대통령과 송요찬 내각 수반이 달아주고 있다(1961년). ⓒ 자료사진

 
쿠데타 당일인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로 출발했다가 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된 이 기구의 각종 결정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윤보선 대통령이 승인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쿠데타 당시에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가 그해 11월 1일 대장으로 진급하기까지 '별 셋'과 '별 넷'을 달아준 사람도 윤보선이다.
 
그래서 윤보선은 적어도 법적 측면에서는 박정희 쿠데타의 일등공신이었다. 본인이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압 때문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는 어느 정도의 적극성 내지 자발성을 보이며 박정희 정권을 지원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박정희 공격

이로 인해 박정희 측으로부터 '당신도 결국 우리 편 아니냐?'는 식의 말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다. 대통령직을 사임한 윤보선이 1년 뒤인 1963년 대선에 출마해 '박정희는 민주주의 신념이 의심스러운 자다'라는 공격을 퍼붓자, 박정희 후보 대변인인 이후락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1963년 9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 '왜 폭로 작전을 쓰나'에 따르면, 이후락은 5·16 주체세력의 이념 성향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면서 "혁명정부의 이념에 대해서는 5·16 혁명을 환영·합리화하고 또 1년여 혁명정부의 대통령으로서 혁명을 적극 지도해주신 윤보선씨에게 물으면 더욱 잘 알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처럼 청와대로 몰려든 군인들 때문에 쿠데타 조력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는 점에서, 윤보선은 박정희에게 이용당한 희생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두 사람 관계를 이렇게 규정하고 끝낼 수는 없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이용한 것 못지않게 윤보선이 박정희를 곤경에 빠트린 측면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라고 한다. 상대방이 육체적 완력이나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현저히 떨어지는데도, 이상하게 그 앞에 가면 기가 죽는 일이 있다. 이런 양상이 박정희와 윤보선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났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공개 석상에서 '박정희씨'라고 불렀다. 196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씨'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존대의 의미를 많이 살릴 수 있었지만, 그 시절에도 대통령을 '아무개씨'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통념과 괴리됐다. 그런데도 윤보선은 그렇게 불렀다. <인물과 사상> 2016년 2월호에 실린 역사저술가 김용관의 '박정희와 윤보선'에 이런 일화가 소개돼 있다.
 
1964년 7월 8일, 제1야당 윤보선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시국 대책 연설을 하면서 전날 있었던 박정희의 특별교서를 하나씩 비판했다. 그런데 연설문을 낭독하는 내내 윤보선은 '박정희씨'라고 불렀다. 공화당 의원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장내는 시끄러워졌고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 퇴장해버렸다. 윤보선은 한 번도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의원내각제 하에서 허수아비 대통령이나 다름없었던 그는 청와대에 몰려온 군인들을 보고 겁에 질려 다시는 정치 쪽에 얼씬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적 투지가 더 강해졌다.
 
윤보선은 1963년과 1967년 대선에 연이어 출마해 박정희와 겨뤘다. 1967년 대선에서는 40.9%를 득표해 51.4%의 박정희에게 10%p 이상 뒤졌지만, 1963년 대선에서는 45.1%를 득표해 46.6%의 박정희와 근소한 차이를 기록했다. 
 

윤보선 후보 부부가 제5대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1963년 대선이 군부정권 하에서 불공정하게 치러졌음을 감안하면, 45.1% 대 46.6%라는 공식 결과가 실제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윤보선이 박정희 체제에서도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과 무관치 않을 수도 있다.
 
윤보선은 68세 때인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고문으로서 당원들과 함께 서울 안국동 로터리에서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벌였다. 오늘날의 헌법재판소 근처이자 자기 집 근처인 이곳에서 그는 경찰의 비상식적인 진압 작전에 직면했다. 1965년 6월 22일 자 <경향신문> '투위(鬪委), 성토와 연좌데모'에 따르면, 경찰은 윤보선을 포함해 50여 명이 모여 있는 데다가 최루탄을 8발이나 떨어트렸다. 사회지도층들을 향해 8발이나 쏜 것은 그들이 자리를 쉽게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8발이나 떨어지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자리의 어른인 윤보선이 얼마나 독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황한 박정희 진영 허둥지둥

윤보선이 유독 박정희한테 강했다는 점은 박정희의 치명적 약점이 될 만한 메가톤급 폭로가 그의 입에서 나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963년 대선 때 윤보선이 폭로한 박정희의 공산당 경력 및 여순항쟁(여순사건·여순반란) 연루 의혹은 박정희는 물론 박정희 지지자들의 족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보다도 더한 반공 국가를 표방한 박정희에게, 공산당 경력은 치명적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박정희의 이념적 모순, 앞뒤 안 맞는 출세욕, 인간적인 의리를 경시하는 특성 등을 노출함으로써 박정희에 대한 신뢰성을 두고두고 떨어트리는 요인이 됐다.
 
폭로할 당시 윤보선은 '박정희는 빨갱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런 공격은 박정희 진영을 당혹하게 하고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이를 보다 못한 박정희 후보 찬조 연사인 이만섭이 '당신은 친미주의자 아니냐?'며 다소 엉뚱한 반론을 펴는 일이 있었을 정도다.
 
1963년 10월 13일 자 <동아일보> 기사 '10·15 선거 마지막 유세'에 따르면, 이만섭은 "윤보선씨가 박정희씨를 빨갱이라고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중상모략이며, 윤씨는 인질로 잡혀서라도 미국 원조를 더 얻어오겠다고 했는데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겠는가?"고 말했다. 그 역시 친미주의자인 박정희 쪽이 윤보선의 친미 성향을 공격하는 상황이 연출됐을 정도로, 윤보선의 공격은 박정희 캠프에 혼란을 던졌다.
 
박정희는 윤보선의 공격을 '매카시즘적 수법'으로 받아쳤다. 1963년 10월 3일 자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인 '낡은 매카시즘의 수법'에서 나타나듯이, 박정희는 윤보선이 제기한 사상 논쟁을 구태의연한 정치 악습으로 몰아붙였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사상을 문제 삼고, 박정희는 윤보선의 친미 경력을 비판하며 그의 행태를 매카시즘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풍긴다. 윤보선이 보수·수구세력을 연기하고, 박정희가 진보 진영을 연기했던 셈이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윤보선 가문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았다. 박정희 역시 친일파였으므로 이런 공격은 반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자신을 잊게 할 정도로 윤보선이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정체성의 혼란을 보였다는 것은 윤보선의 공격이 그만큼 매서웠음을 의미한다.
 
쿠데타 당시만 해도 박정희에게 밀리는 듯했던 윤보선은 이처럼 청와대를 나오고 박정희 그늘에서 벗어난 뒤로는 박정희가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됐다. 그런 윤보선 앞에서 박정희는 '딸 바보' 못지않은 '윤보선 바보'가 되어야 했다. 처음에는 당하는 듯했지만 나중에는 박정희를 골탕 먹인 윤보선은 박정희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뒤에도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1990년에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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