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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9.16 08:18 수정 2020.09.16 08:18
 

미국 <워싱턴 포스트>가 2017년 2월부터 내건 공식 슬로건이다. 신문 제호 아래 공식 슬로건이 새겨진 건 창간 14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 워싱턴 포스트

 
Democracy Dies in Darkness
(민주주의가 암흑 속에서 죽어 간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가 2017년 2월부터 내건 공식 슬로건이다. 신문 제호 아래 공식 슬로건이 새겨진 건 창간 14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네 글자의 슬로건을 처음 보았을 때 든 의문은 왜 지금 시점일까. 종이 신문의 절대 위기 상황에서 창간 140주년을 맞아 심기일전으로 위기를 돌파하게 만드는 <워싱턴 포스트>의 정신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아니면 지금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절박감이 있는 것일까. 더군다나 채택 시기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직전이다 보니, 그 자신 거짓을 입에 담아온 데다, 증오와 혐오를 마구 쏟아내는 극우를 등에 업은 트럼프 대통령과 이 슬로건의 출현을 연관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주류 언론을 향해 '망해가는 신문사', '가짜뉴스의 생산지'라며 저주와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 자신이 온갖 가짜 뉴스를 퍼트려온 터다. 때문에 트럼프 시대를 '암흑 시대',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시대'로 내다보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공식 슬로건 채택 과정의 뒷이야기를 담은 <워싱턴 포스트> 기사(2017.2.24.)를 보니, 이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 훨씬 전이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 표현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 사용한 인물은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터트린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인 탐사보도 기자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였다. 그는 닉슨 대통령 시절과 워터게이트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민주주의가 암흑 속에서 죽어 간다'는 말을 종종 사용해 왔으며, 자신은 이 표현을 언론 자유와 관련된 소송의 판결문에서 수년 전 접했다고 밝혔다.
 
<워싱턴 포스트>의 공식 슬로건 채택을 논의한 이 회사 직원들은 밥 우드워드 기자의 이 '네 단어짜리 표현'을 포함하여 모두 500개의 슬로건 후보를 놓고 오랜 기간 논의한 끝에 결국 '민주주의가 암흑 속에 죽어 간다'는 슬로건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극우 언론이 만드는 암흑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 계정에 올린 CNN을 떄려 눕히는 영상 2017.7.2 ⓒ 유튜브 영상 캡처

 
이런 과정을 보면 이 신문의 공식 슬로건 채택은 트럼프와 직접 관련 없이 진행되어온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온갖 가짜뉴스들과 해괴한 음모론들, 거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가짜뉴스와 거짓을 거침없이 쏟아내온 지난 3년여의 트럼프 시대를 보면, 결과적으로 <워싱턴 포스트>의 슬로건은 시대의 핵심을 뚫어본 것이라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를 적극 지원해온 극우 언론, 극우 집단이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암흑 세계를 만들어온 것이다.
 
트럼프의 거짓을 가장 집요하게 추적해온 곳이 <워싱턴 포스트>다. 이 신문의 '팩트 체커'(Fact Checker) 관련 기사를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뒤 827일 만에 모두 1만 건의 '거짓과 잘못된 주장'을 해 하루 평균 12개, 그리고 그 후 440일 동안에는 그 빈도가 훨씬 잦아져서 하루 평균 23개의 거짓과 잘못된 정보들을 쏟아냈다. 그래서 지난 7월 9일, 트럼프의 거짓과 잘못된 주장의 숫자는 마침내 2만 개를 돌파했다.
 
특히 총 확진자 650만 명, 사망자 20만 명에 이르는 코로나19 대유행의 상황 속에서, 코로나19와 경제 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거짓말 숫자는 치솟았고,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 탄핵과 경찰의 흑인 총격 살해 사건 이후 인종 문제까지 터져 나오면서 트럼프의 혐오 발언과 거짓의 빈도도 함께 증폭되었다.
 
트럼프의 거짓말 행진에는 미국 극우 보수 채널인 <폭스뉴스>가 한몫을 단단히 해왔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가 하루 동안 거짓과 잘못된 정보를 가장 많이 쏟아낸 날이 올해 7월 9일 '트럼프의 거짓과 잘못된 주장 2만 개'를 돌파한 날이다. 이날 그는 모두 62개의 거짓과 잘못된 주장들을 쏟아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이 <폭스뉴스>의 숀 해니티(Sean Patrick Hannity)와 한 인터뷰에서였다는 것이다.
 
건강한 미국 언론, 사회의 균형추 역할

이렇게 거짓투성이의 트럼프 대통령과 극우 보수 채널인 <폭스뉴스>, 온갖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퍼트리는 디지털 플랫폼, 여기에 인종차별과 극우의 극단주의자들 주장이 어우러지면서 '민주주의가 암흑 속에 죽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들어맞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오는 11월 3일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여러 음산한 시나리오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트럼프 시대의 미국 민주주의가 암흑 속에서 요동을 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런 극단의 무리들과 힘의 균형을 맞추는, 저널리즘 기본에 충실한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수많은 신문들, CBS 등 민간방송, 공영방송 PBS 등 건강한 언론들이 있다. 이들 언론에서는 저널리즘의 기본을 지키지 못하는 기자들은 바로 퇴출당한다(다른 기회에 다룰 예정임).

인종 차별, 의료보험, 빈부 격차, 총기 사고, 극우 성향의 인종주의자, 복음주의자 등 미국 사회의 온갖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그나마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이처럼 저널리즘 기본에 충실한 건강한 미국 언론의 존재와 역할이 크다고 나는 본다.
 
물론 이런 미국 언론에도 분명한 한계는 있다. 9.11 테러 이후 이라크 침공 때 미국 언론은 미국 중심 국가주의, 미국 제일주의의 한계와 문제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런 한계에도 미국 내 문제에서 저널리즘의 기본에 충실한 미국의 건강한 언론들은 사회의 균형추가 되어 왔다.

스스로 암흑이 된 권력집단
 

'제8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5일 오후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이 있는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열렸다. 한 참가자가 '검찰개혁' 다음은 '언론개혁'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2019.10.5 ⓒ 권우성

 
'민주주의가 암흑 속에서 죽어간다'는 이 슬로건은 한국에서라면 선뜻 이해가 된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말과 정보의 흐름이 막히는 암흑을 직접 체험하였고, 지금은 언론이 우리 사회의 흉기로 작용하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집단이 돼 진실의 등불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정희·전두환의 군부 독재 시절, 정치 권력의 폭압으로 언론에 재갈이 물렸을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암흑 속에 죽어갔다. 민주주의 몸의 핏줄인 언로는 곳곳이 막혀 있었다. 단 한 줄의 '사실'을 전달하려다 감옥에 가고, 잡혀가고, 두들겨 맞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 민주의 광장이 넓어지면서 언론 자유의 공간도 넓어졌다. 한국언론은 시민 항쟁의 결과에 무임승차한 뒤 언론이라는 영향을 바탕으로 권력 집단이 되었다.
 
권력 집단이 된 한국언론은 넓어진 언론자유의 공간이 주는 혜택과는 반비례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무소불위의 집단이 되었다.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쏟아내는, 확인되지 않은 온갖 일방적 보도들을 보면, 대다수 한국언론은 사회의 암적 존재이고 암흑 세력으로 되어버렸음이 분명하다. 오죽하면 언론진흥재단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윤창빈씨가 "30여 년 언론진흥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제 언론이 망해야 이 나라가 살 거 같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을까.

지금도 쏟아져 나오는 대다수 언론의 거짓, 왜곡, 증오, 일방적 주장, 선정주의에서 저널리즘의 기본인 정확성, 공정성, 진실, 정직 그런 가치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건 언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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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