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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4.03 11:59 수정 2020.04.03 11:59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이종찬, 조부 이하영, 부 이규원과 함께 3대가 친일을 했다. 그러나 그의 묘비 어디에도 관련 내용은 없다. ⓒ wiki commons

 
"호국의 큰 별 이종찬 장군"

1905년 11월 을사늑약 당시 법부대신으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이하영의 손주이자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단체 조선귀족회에서 이사와 부회장을 지낸 이규원의 장남인 국가공인 친일파 이종찬의 묘비에 새겨진 말이다. 이하영과 이규원 그리고 이종찬, 3대에 걸쳐 온 집안이 친일반민족 행위를 했다. 그러나 이종찬의 묘비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새겨졌다.
 
"호국의 큰 별 이종찬 장군은 경주이씨의 후손으로 조(이하영)는 정2품 정헌대부 외부대신․법무대신 휘 하영 공이며, 부(이규원)는 종2품 가선대부 시종원 시종이었던 휘 규원 공이니라. 명문의 혈통으로 지인용을 겸비한 자로 일찍이 건국의 포부를 지녀 6.25동란 시엔 제3사단장으로서 북진의 선봉장이 되어 이 나라 전사에 탁월한 전략 전술가로서의 영명을 남겼도다."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49기로 졸업한 이종찬은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 후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본 입장에서 조선귀족 이하영의 손자가 소대장 신분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당시 언론들도 이를 부각했다. 

일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된 조선귀족
 

1938년 9월 13일자 <매일신보> 3면에 실린 이종찬 관련 기사. ⓒ 공훈전사사료관_한국연구원소장본

 
일제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38년 9월 13일자 신문에 "이종찬은 지나사변(중일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참전해 상하이 방면에서 큰 활약을 했다"면서 "북지와 남지를 전전하며 공훈을 세웠다"라고 크게 보도했다. 이종찬이 직접 쓴 "일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한다"라는 내용의 진중시도 게재했다. 
 
적병들이 왕가진을 사수하니 / 육탄으로 돌격한 15용사여 
화염과 폭음이 천지를 뒤흔드니 / 그 이름 천추에 전해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네
- 왕가진의 15용사를 읊다 
  
1938년 이종찬은 중위로 진급했다. 1941년 3월 대위로 진급한 뒤 공로를 인정받아 훈6등의 훈장도 받았다. 이듬해인 1942년 2월 이종찬은 다시 한 번 훈장을 받는다. 최고등급인 금치훈장이었다. 일제강점기 36년을 통틀어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건 이종찬이 유일했다. 1942년 2월 24일 자 <매일신보>에 이종찬의 금치훈장 수상이 자세히 보도된 이유다.
 
"일억 국민이 아직까지 국민적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는 23일 지나사변 논공행상이 발표됐다.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이종찬 중위(현임 대위)가 금치훈장의 은명을 배수하여 영예를 떨치었다. 이종찬 대위는 조선귀족회 부회장 이규원 자작의 영식으로 소화 12년(1937년) 6월 육사를 졸업하자 소위로 임관해 그해  8월 지나사변이 발발함과 동시에 용약 제일선에 출동해 용맹을 날리었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이종찬은 육군포공학교를 거친 후 뉴기니에 공병으로 파병됐다. 그곳에서 태평양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전선을 옮기며 일제에 부역했다. 전쟁 후반부에는 독립공병 15연대 연대장 대리를 맡기도 했다.

해방 후 잠시의 은둔생활, 그러나
  

[현충원 안장 친일파] 이종찬 묘지 3대가 친일했지만 묘비에는 3대의 영광만 언급됐다 친일파 이종찬의 묘는 장군3묘역 최상단에 자리해 있다. 장군3묘역은 임정요인과 애국지사묘역과 고개 하나를 두고 있지만 두 묘역 간 거리는 직선으로 따지면 65m에 불과하다. ⓒ 김종훈

국립서울현충원 장군3묘역 첫 번째 무덤에 잠들어 있는 이종찬은 해방 후 1년 뒤인 1946년 6월에 한국에 돌아왔다. 일본 군인으로 역할했던 것을 반성한다는 의미로 잠시 은둔생활을 했지만 1949년 6월 육사 정훈 1기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일본군 당시 마지막 계급이 대위였던 이종찬은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 후 국방부 제1국장 겸 정훈국장에 임명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수도경비사령관을 거쳐 3사단장을 역임했다. 1951년 6월 별 두 개인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뒤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한 사건) 때 이승만 대통령의 군부대 동원 명령을 거부해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해임됐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참모총장은 자동적으로 계엄사령관이 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종찬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했으나, 이종찬은 응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종찬'을 검색하면 '참군인'이라는 말이 항상 따라붙는 이유다.

참모총장 자리에서 해임된 이종찬은 195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53년 복귀 후 육군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60년 이승만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물러나자 허정 내각은 이종찬을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했다.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의 5.16군사쿠데타 후 주이탈리아 대사로 부임해 67년까지 수행했다. 1976년 공화당 소속으로 9·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1980년 국회가 해산되자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구락부 회장을 지냈다. 1983년 2월 10일 사망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보고서에 "1937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공병 소위로 임관해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전해 적극 협력했다"라며 "중일전쟁에 참전했을 때 상해 일대에서 소대장으로 활약하며 금치훈장을 받기도 했다"라고 적었다.
"이종찬이 일본정부로부터 1941년 훈6등 서보장을, 1942년에는 특별한 '무훈'이 있는 자에게 수여되는 금치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9호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

이종찬은 아직도 국립서울현충원 장군3묘역 상단 첫 번째 무덤에 잠들어 있다. 정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결정하고 이를 통보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었다. 
 

이종찬 (1916~1983) - 3대가 친일했지만, 묘비엔 '명문 혈통' 1905년 을사늑약 당시 법부대신으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이하영의 손주이자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단체 조선귀족회에서 이사와 부회장을 지낸 이규원의 장남이다. 일본 육사 49기를 졸업한 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조선인 출신 일본 장교로는 유일하게 일본 금치훈장을 받았다. "일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내용의 시를 언론에 게재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 군인의 삶을 반성한다는 의미로 은둔생활을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육군 대령, 3사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까지 역임했다. 3대가 친일을 했지만 그의 묘비는 찬양 일색의 문구로만 채워졌다. "명문의 혈통으로 지인용을 겸비한 자로 일찍이 건국의 포부를 지녀 6.25동란 시엔 제3사단장으로서 북진의 선봉장이 되어 이 나라 전사에 탁월한 전략 전술가로서의 영명을 남겼도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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