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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4.02 12:36 수정 2020.04.02 12:37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군의 아버지시여"

1985년 사망한 국가공인 친일파 이응준의 묘비에 새겨진 말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군인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이응준을 우리 국군의 '아버지'라 칭했다. 묘비의 문구는 "님은 힘을 믿으셨기에 겨레를 위해 힘을 창조하였다. 님은 힘의 노예가 되지 않으시고 관용과 사랑을 택하였다"라고 이어진다.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이응준은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 wiki commons

 
이응준은 1914년 5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래로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일제의 군인으로 일본에 충성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조선 출신임에도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올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본 육사 동기인 지청천(훗날 광복군 총사령)이 1919년 일본 군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탈출한 것과 달리 이응준은 일본군 장교의 신분에 안주하고 반평생을 일제에 충성하는 직업 군인이 되었다"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은 갖고 있었다고 보이지만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에 대한 관념이 결여돼 결국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조선출신 일본군 장교로서 그의 전반기 생애를 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된 일본군 대령

이응준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함경남도 원산항에서 수송 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개인적으로 탈출해 서울에 들어왔다. 11월엔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전국조선임시군사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미군정과 긴밀히 접촉해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국방사령관 고문으로도 위촉됐다.

이응준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김백일, 백선엽, 김홍준 등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미군정 운영 군사영어학교에 보낸 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이력으로 인해 묘비에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라고 쓰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했다"라고 명시돼 있다. 이는 곧 국군의 뿌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 어디에도 이응준과 같은 일본군 출신이 대한민국 국군을 창군했다는 말은 없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김구 주석과 지청천, 이범석 장군 등이 중심이 돼 조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이다. 1942년 약산 김원봉 장군의 조선의용대를 흡수한 뒤 정규군으로서의 면모를 만방에 과시했다. 한국광복군 사령관은 이응준의 일본 육사 동기로 활동하다 독립군이 된 지청천 장군이 맡았다.
 

[현충원 안장 친일파] 이응준 묘지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그가 남긴 친일 찬가 친일파 이응준의 묘는 장군2묘역 입구에 자리해 있다. 장군2묘역 아래쪽에는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과 애국지사들이 묘역이 있다. 두 묘역 간 거리는 직선으로 40m에 불과하다 ⓒ 김종훈

 
국방경비대총사령부 감찰감, 국방경비대 제3여단장, 초대 육군 참모총장까지 거친 이응준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5사단장, 전라남도편성관구사령관, 마산지구계엄사령관, 제주지구계엄사령관, 전라남도계엄민사부장도 두루 맡았다. 한국전쟁 중 국방부장관이었던 신성모와의 불화로 1950년 11월 전역한 뒤 상이군인회 회장이 됐지만 신성모가 물러난 뒤 복직해 육군대학 총장과 육군훈련소 소장을 지냈다.

1955년 9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체신부장관에 임명했다. 1958년 가을부터는 자유당 성북구을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다.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 후 '정치활동정화법' 대상자로 분류돼 정치활동이 규제됐지만 1963년 해제 후엔 신정당 등 야당에서 활동했다. 1967년 반공연맹 이사장, 1979년 국정자문위원, 1980년 국방정책 자문위원장, 통일원 고문을 지낸 뒤 1983년에는 인촌문화상을 수상했다. 1985년 7월 8일 95세의 나이로 사망해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 장군2묘역에 묻혔다.

독립운동가 옆에 누운 친일파
 

[현충원 안장 친일파] 이응준 묘지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그가 남긴 친일 찬가 친일파 이응준의 묘는 장군2묘역 입구에 자리해 있다. 장군2묘역 아래쪽에는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과 애국지사들이 묘역이 있다. 두 묘역 간 거리는 직선으로 40m에 불과하다 ⓒ 김종훈

  
초임 장교 시절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응준은 1935년과 1939년에 일본군 장교로 장기간 복무한 공적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2회에 걸쳐 훈장을 받는다. 

그는 일본에서 무슨 일을 했기에 훈장을 받은 걸까. 위원회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이응준의 친일 행적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이응준은 1918년 시베리아 간섭전쟁(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성립된 소비에트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미·영·프·일 등이 일으킨 전쟁 – 기자 주)에 출정해 그 지역 조선인에 대한 선무공작을 하는 등 정보수집업무에 종사했다. 1920년대에는 조선군 소속 장교로 곽송령 사건, 제남사건, 장작림폭살사건 등 일제의 중국 무력간섭 침량행위에 참가해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일본군 장교로 참가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 중좌로 중국 전선에 출정해 각종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엔 북지파견군 소속으로 병참수송업무 및 청도 교육대장, 산동성 황해안 전투 등에 참전해 병참수송업무를 담당하며 적극적으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1939년 3월 1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이응준 ⓒ 공훈전시사료관

 
1941년 일본군 육군 대좌로 승진한 이응준은 이후로 신병 보충과 교육 업무,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는 수송 업무에 집중했다. 이응준은 여러 차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선동하기도 했다. 일제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43년 8월 3일자에 실린 '생사를 초월하라'라는 제목의 기사 중 일부를 보자. 기사는 이응준 회견기 형태로 작성됐다. 
"금회 조선에 징병제 실시에 의하여 조선 청년에게도 국가 방위의 숭고한 병역 의무가 부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상의 광명이며 명예다. 자기 나라를 자기 손으로 수호함은 국민의 지고한 의무인 동시에 당연한 권리다. 대원수 폐하의 고굉(손과 발)으로 황군의 일원으로 한번 죽음으로써 그 책무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를 완수하는 길이다."

위원회는 "이응준의 이러한 행위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특별법 제2조 11호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특별법 제2조 19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제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평가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지청천(본명 지석규)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생도 출신으로 독립전선에 뛰어들었다.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대전자령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관을 맡았다. ⓒ 독립기념관

 
사후 이응준은 국립서울현충원 장군2묘역 첫 번째 자리에 묻혔다. 정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결정을 통보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대로다. 그의 무덤 우측 하단에는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는 이응준처럼 일본 육사를 나왔지만 1919년 중국으로 망명 후 훗날 광복군 총사령까지 된 지청천 장군도 있다.
 

이응준 (1890~1985) - '천황에게 충성하자'던 이가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조선 출신임에도 일본군 대좌까지 올랐다. 여러 차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선동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본 육사 동기인 지청천(훗날 광복군 총사령)이 1919년 일본 군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탈출한 것과 달리 일본군 장교의 신분에 안주하고 반평생을 일제에 충성하는 직업 군인이 되었다"며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에 대한 관념이 결여됐다"고 평가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개인적으로 탈출해 서울로 들어왔다. 친일파 김백일, 백선엽 등 일본-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시키는 등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초대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낸 뒤 195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묘비엔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라고 쓰였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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