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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3.15 20:04 수정 2020.03.15 20:04
와인 마실 때 적정 온도 유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 술 하나 마시는데 뭐 그리 번거롭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이들도 맥주나 사이다는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마시고, 차갑게 식은 소고기 미역국은 꼭 데워서 먹는다.

미지근한 맥주, 따뜻한 사이다, 차가운 소고기 미역국은 솔직히 별로 아닌가. 와인 역시 적정 온도 범위를 벗어나면 풍미가 급격하게 꺾인다.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스파클링 와인에 따라 시음 적정 온도가 다른 것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대략 레드 와인은 섭씨 15~20도, 화이트 와인은 10~13도, 스파클링 와인은 5~9도 정도다.
 
추상적인 숫자로 얘기하면 뜬구름 잡는 것 같으니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지난 2월 24일 김포의 떼루아 와인아울렛 할인 장터에서 떼땅져 브뤼Taittinger Brut 샴페인을 할인가로 구매했다. 아내가 샴페인을 좋아하기도 하고 해산물과 곁들여 마시기에 제격이기도 해서다. 떼땅져Taittinger는 와인 회사명, 브뤼Brut는 달지 않은 스파클링 와인을 뜻한다. 3월 4일 저녁에 마시기로 결심하고 일찍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떼땅져 브뤼 ⓒ 고정미

 

떼땅져 브뤼 떼땅져Taittinger는 와인 회사명, 브뤼Brut는 달지 않은 스파클링 와인을 뜻한다. 아내가 샴페인을 좋아하기도 하고 해산물과 곁들여 마시기에 제격이기도 해서 구입했다. ⓒ 임승수

   
당일 아침 샴페인을 미리 냉장고에 넣었다. 내부 온도가 섭씨 5도이니 샴페인 마시기에 딱 좋지 아니한가. 하지만 마음 놓기에는 아직 이르다. 저녁에 꺼내어 마시다가 실내 온도로 인해 샴페인 온도가 상승하면 김빠진 맥주처럼 맥아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우미가 필요하다. 바로 아이스 버킷과 얼음이다.
 
아이스 버킷이라고 해서 뭐 거창한 물건이 필요한 건 아니다. 얼음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용기면 된다. 나는 마트에서 몇천 원 주고 구입한 투명 플라스틱 재질의 아이스 버킷을 이용한다.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니 본연의 기능에만 충실하면 되지 않겠나. 아이스 버킷에 얼음을 담고 샴페인을 꺼내어 얼음에 푹 담가 저온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야 샴페인의 멋들어진 풍미를 마지막 잔까지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샴페인과 어울리는 최고의 안주는 역시 조개류, 게살, 랍스터이다. 뒤늦게 배달 음식의 매력에 빠진 나는 그날도 배달의민족 앱을 구동했다. 검색을 통해 5점 만점에 무려 4.9점에 달하는 조개찜 식당을 발견하고는 흐뭇한 마음으로 가리비찜과 낙지를 주문했다. 예전 같으면 일부러 찾아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갓 조리된 상태로 배달받아 먹을 수 있다니, 사람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시간이 흘러 벨이 울리고 음식이 도착했다. 첫째 딸 손바닥 만한 껍질 안에 조약돌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가리비 살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물 속에서 온수 목욕을 끝내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수십 년간 젓가락질을 한 나는 조갯살을 집는 것만으로도 그 육질의 기량을 가늠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놈을 집어 들었는데, 이건 뭐 젓가락을 통해 느껴지는 푹신하면서도 탱글탱글한 반발력만으로도 침이 고이는 것 아닌가. 고추냉이가 풀어진 맛간장에 가리비 살 끝 부분을 살포시 찍어 입에 넣는다. 하나도 비리지 않은 신선한 바다 내음새가 퍼지는 가운데 탱글탱글한 질감이 저작 운동을 하는 턱 근육을 부드럽게 마사지한다. 어느새 찜 음식 특유의 부드러운 온기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아이스 버킷에 담긴 샴페인, 그리고 가리비찜 온탕(가리비찜)과 냉탕(샴페인)을 오가는 맛의 롤러코스터는 현란하기 그지없다. ⓒ 임승수

   
온탕을 즐겼으니 이제 냉탕에 들어갈 차례다. 옆에서 얼음찜질 중인 샴페인을 잔에 따라 꼬릿한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들이킨다. 특유의 이스트 향에 신선한 과일 풍미, 탄산의 청량함이 섭씨 5도를 살짝 웃도는 시원함으로 가리비의 짭조름한 기운을 개운하게 씻어내린다.

두 음식이 빚어내는 맛의 시너지는 실로 대단해서, 온탕(가리비)과 냉탕(샴페인)을 오가는 맛의 롤러코스터는 현란하기 그지없다. 얼음이 담긴 아이스 버킷 덕분에 샴페인의 냉탕 효과를 가리비 살 최종 한 점까지 꾸준히 음미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샴페인은 온도 상승으로 자신의 장점인 싱그러움을 잃고 구박을 받았을 것이다.
   
와인이 대중화되면서 (샴페인을 포함해) 화이트 와인 계열은 좀 차게 마셔야 좋다는 것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레드 와인은 별다른 고민 없이 실온에 방치해 마시는 경우가 많다. 겨울철에도 난방 때문에 실내 온도는 섭씨 25도 가까이 올라간다. 한여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온도에 레드 와인을 장시간 방치하면 온도 상승으로 풍미가 떨어진다. 그런 이유로 나는 레드 와인을 마실 때도 아이스 버킷을 준비한다. 다만 버킷에 얼음 대신 찬 수돗물을 받아 놓는다. 마시다가 온도가 너무 올라갔다 싶으면 와인 병을 버킷에 담가 찬물로 온도를 조절한다. 여름에는 찬 수돗물로 역부족이어서 얼음도 준비한다.
 
온도에 따라 변하는 레드 와인의 풍미는 마치 꽃봉오리와도 같다. 온도가 너무 낮으면 꽃잎을 닫아서 꼭 움츠리고, 온도가 너무 높으면 꽃잎이 너무 벌어져 상쾌함과 생기가 떨어진다. 이런 건 백날 말로 설명해 봐야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궁금하다면 실험해 보기를 권한다.

레드 와인을 마시기 두 시간 전에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꺼낸 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마시면서, 와인 온도 상승이 맛과 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직접 체험해 보시라.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할 것이다. 와인을 마실 때 잔의 보울 부분을 잡지 않고 가느다란 줄기 부분을 잡는 이유도 와인의 온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서다. 절대 겉멋 부리는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와인 전용 온도계를 구입해서 온도를 측정하며 마시는 사람도 있다. 나도 온도계를 이용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구매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코와 혀로 직접 확인하면서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수준으로 온도를 조절한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코에서, 그리고 내 입에서 가장 맘에 드는 순간이 최적의 온도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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