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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2.22 12:16 수정 2020.02.24 21:36
김현동은 연길비행장으로 가기 위해 아내, 두 딸과 함께 차에 올랐다. "오늘까지 떠나라"는 최종 통보가 중국 공안으로부터 도착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침부터 집 앞에 나와 배웅을 해줬다. 옥수수와 고구마를 건네기도 하고 100원, 200원 인민폐를 쥐어주기도 하고 말없이 눈물을 훔치면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정겨운 이웃들이었다.
 
1996년 중국으로 이주한 후 김현동의 가족은 연길시 수도공 사거리 한켠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벽은 금이 가고 배관은 녹슬고 겨울이면 창문 틈으로 매운 바람이 이빨을 내밀고 들어왔다. 그래도 저녁이면 도란도란 둘러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보금자리였다. 이역만리 외로움을 달래준 그 정든 집과도 헤어져야 했다.
 
공항 가는 길, 차 안에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흙먼지를 뒤집어써 뿌연 차창 너머로 '연길'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딸들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다. "아빠, 가지마!" 둘째 딸 산하가 울면서 매달린다. 아내도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친다.
 
3년 전 김현동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동포사업국 사무국장으로 가족과 함께 중국 땅을 밟았다. 그때 조선족 사회를 짓밟은 '초청사기'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 가서 취업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 동포사회를 휩쓸었다.
 
1994년 10월부터 초청비자가 금지되고 산업기술연수생제도가 실시되면서 한국과 중국의 전문브로커들이 등장, 조선족 사회에서는 연수자격 취득을 비롯해 결혼, 유학 사기들이 숱하게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자살과 홧병, 이혼으로 산산 조각난 가족들이 많았다. 김현동이 현지에서 파악한 규모를 보면, 동북 3성에서 무려 1만8000가구가 피해를 입었을 정도였다. 그 액수도 1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다양했다.
 
김현동은 우선 '동북3성조선족한국사기피해자협회'를 만들어 피해자 구조사업을 벌였다. 98년 무렵부터 북한이 식량난을 겪으면서 '난민'들이 연변으로 넘어오게 되자 자연스레 '식량난민'을 돌보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아빠, 금방 올 거지?" 탑승장에 들어서려는 김현동의 옷 소매를 잡고 큰 딸 의연이가 다짐을 받듯 묻는다. 아직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내가 겨우 마음을 추수리고 "아빠는 출장간다"며 딸 의연이와 산하를 다독였다.
 

바리의 꿈, 김현동대표 그는 연길과 연해주를 거쳐 지금은 동해시에서 동북아 코리안의 연대와 우정을 위해 삶을 바치고 있다. ⓒ 민병래

 
98년초 '조선족사기피해자협회' 활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김현동은 이를 '우리민족서로돕기 중국협회'로 바꿔나가려 했다. 그런데 이 시도가 중국 당국을 자극했다. 그래서 주 공안국에 어느 날 연행되어 이틀간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후 98년 10월부터 3개월간 여권을 빼앗긴 채 집에 연금돼 조사를 또 받았다. 그리곤 99년 1월 1일 자로 '7년간 입국금지' 조치를 당했다. "불법 월경자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활동"으로 국경출입국 관리법 40, 41조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럼. 아빠 열밤만 자고 선물 많이 사가지고 올게" 그렇게 허허로운 약속을 하고 김현동은 탑승장에 들어섰다. 돌아서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앞만 보고 걸어갔다.
 
고려인 1호 정착촌 우정마을을 세우다
 
2010년 11월 18일 김현동은 연길을 다녀오는 출장길에 우수리스크행 국제버스를 탔다. 멀리 크라스키노 해관이 눈에 보인다. 중국의 훈춘과 러시아의 핫산을 잇는 관문, 이곳에서 입국심사를 받아야 한다. 여기를 통과하면 우수리스크까지는 반나절 길이다. 11월이지만 극동지방은 이미 한 겨울이다.
 
김현동은 입국심사대에서 경계하는 눈빛을 받더니 곧장 출입국사무소로 안내(?)되었다. 김현동을 세워놓고 그들은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돌려댔고 서류를 만들고 통역을 부르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파란 빛이 도는 문서 한 장, '입국금지명령서'를 툭 내밀었다.
 
"2004년부터 우수리스크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난 러시아 국내법을 위반한 적이 없습니다."

통역을 앞에 두고 김현동이 설명을 이어갔다. 난방이 시원찮은 사무실에는 한기가 뱀꼬리처럼 매달려있었다. 한나절을 버티면서 항의도 하고 매달려도 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학시절 강제연행되어 징집통지서에 강제로 손도장을 찍던 것처럼 파란 문서에 이름을 쓰고 말았다.

김현동은 99년 1월 중국에서 추방된 후 현지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99년 5월에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로 넘어갔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연해주 고려인으로까지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국내에서 '동북아평화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2004년에는 우수리스크에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이라는 현지조직을 결성, 이사장이 되었다.
 
소련 연방 해체 후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키스스탄이 민족주의화되면서 고려인들은 배척당하고 국적도 잃어버리는 처지로 내몰렸다. 결국 고려인들은 유라시아 땅을 유랑하게 되었고 4만여 명이 '할아버지의 땅' 연해주로 재이주를 했다.
 
이때 연해주 정부는 돌아오는 고려인에게 군대가 철수한 주둔지를 영구무상임대해 주고 이주 정착을 지원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1937년 자행된 강제이주를 공식 사과하고 보상책을 강구하던 참이기도 했다. 또 구한말 이주해 연해주에 벼농사를 처음으로 성공시킨 고려인이기에 연해주 정부는 고려인이 인구증가는 물론 농업생산에 이바지하리라는 기대도 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넘어와 극동의 추운 기후에 적응하는 것도 문제였고 주택이나 농업기반 등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김현동과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은 재이주한 고려인들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게끔 도우면서 정착촌 건설과 콩 재배를 비롯 연해주 농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대한주택건설협회와 함께 30호 정도로 고려인 제1호 우정마을을 건설했다. 마을을 둘러싼 네 개의 외곽길은 아리랑, 우정, 평화, 사랑길이라고 지었다. 발해 시대 우수리스크의 옛 지명인 '솔빈'이라는 이름을 따 솔빈문화세터와 한글교실도 만들었다.
 
또 콩을 비롯 청국장 담그는 법, 가공공장 건설을 교육하고 지원했다. 그런 노력 덕에 소규모이지만 수십호씩 우정마을, 고향마을 등 6개 마을이 만들어져나갔다. 
 

우정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고려인 정착 1호 마을 30호정도로 고려인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맨 왼쪽 서있는 사람이 김현동 ⓒ 김현동제공

 
한편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은 2004년에 '우수리스크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건설사업을 추진했다. 3000여 평이나 되는 대지에 연건평 1000평이 넘는 사업규모였다.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30억을 지원받고 국내외 단체로부터 10억을 기부받아 어렵사리 2009년에 완공되었다. 연해주동북아기금은 초기 운영을 맡았다가 곧바로 고려인자치회에 운영권을 넘겼다.

이렇게 노력한 세월이 10여 년이건만 난데없이 크라노스키 해관에서 입국금지 명령을 받으니, 김현동은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중국행 버스에 태워진 채 훈춘해관에 도착하니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이자 해관직원인 이동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근처 양꼬치집으로 현동의 손을 잡아끌더니 이과두주 한 잔을 가득 따라주며 위로를 건넸다. 벌컥 들이마시니 쓰면서도 달달하다. 몇 병을 비우고 술집을 나서니 어둠이 훈춘 시내를 삼킬 듯이 내리누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윙윙 거렸던 바람은 김현동의 목을 조를 듯 주변을 휘감았다.
 
아직 가족한테 연락을 못했다. 예정대로면 지금쯤 도착했을 시간인데, 99년에도 연길공항에서 생이별을 했는데 또 헤어져야 한단 말인가?
 
김현동은 숨을 깊게 마시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여보 여기 훈춘인데 오늘 하루 자고 가야겠어. 여기 볼일이 생겨서...애들은 자나..." 주섬주섬 안부를 묻고 통화를 끊는데 연길에서 싸 들고 온 보따리가 손에서 툭 떨어진다. 아내가 좋아하는 '조선족 배추김치', 그리고 딸들이 좋아하는 '인삼사탕'이다.
 
유랑 속에서 핀 민들레
 
김현동은 의연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입장했다. 딸 가진 아빠들이 제일 허전한 순간이라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이 순간이 멈춰졌으면 했지만 사위의 환한 미소가 '어서어서' 하고 재촉하는 듯하다.

딸, 의연이는 김현동이 부천에서 지역노조 사무국장을 할 때 태어났다. 그래서인가 '의연한 산하'라는 노래 제목에서 따와 '의연'이라 이름을 지었다. 둘째는 자연스레 '산하'가 되었다. 연길에 이주했을 때, 의연이는 여덟살이었다. 녀석은 언어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조선족학교나 국제학교가 아니라 이화소학교를 스스로 선택했다. 우수리스크에서는 쉬꼴라(고교과정)을 마쳤고 고맙게도 한중동시통역사로 성장했다.
 
의연이를 사위에게 건네주고 자리로 돌아오려니 둘째 딸 산하가 엄지를 치켜주며 환한 미소를 보내준다. 녀석은 김현동의 동지처럼 컸다. 연해주에서 쉬꼴라를 졸업하고 연방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지금은 우정마을에서 한글교실, 로지나 서당의 강사 노릇을 하면서 아내 주인영과 함께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의 사무를 맡고 있다.
 

유새임과 김산하, 우정마을 둘레길에서 둘은 사촌간인데 동갑이다. 유새임이 대학교 입학전까지 우정마을에서 함께 지내며 우애를 길렀다. 오른쪽 김산하는 고려인마을에서 한글교사로 활동중이다. ⓒ 김현동제공

 
혼주석에 돌아와 앉으니 아내가 손을 꼭 잡아준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내 주인영의 귀밑머리가 하얗다. 2010년 김현동이 입국금지가 되자 아내는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사업을 혼자 도맡았다. 어린 두 딸을 키우면서. 연해주 우정마을, 고향마을 등 6개 마을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꾸준히 도왔다.
 
또 6개 마을에서 생산된 유기농콩과 NON-GMO(유전자변형을 하지 않은 농산물) 콩을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해 냈다. 남편 없이 연해주 너른 벌판에서 고생한 아내는 친구이자 동지였다. 결혼식 덕에 우수리스크에서 건너왔지만 무려 4년 만이다. 그래서 어제는 오랜만에 긴 베갯잎 송사를 나누고 서로를 타박했다. 청국장 퀴퀴한 냄새가 난다느니 중늙은이 군내가 난다느니 생과부 비릿내가 난다느니, 그러면서 온 밤을 새워 서로의 품을 파고들었다.
 
내일 결혼식에 늦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부부는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잠결에 아내는 "우리에게 연해주는 운명인가봐.."라고 몇 번인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2020년 1월1일 새해의 큰 꿈
 
김현동은 2020년 1월1일 이른 아침 강원도 동해시 어달해변을 찾았다. 동해안 바닷가는 우수리스크 우정마을에서 바라보는 지평선 풍경과 닮았다.
 
우수리스크는 6월이면 사방으로 아득하게 펼쳐지는 녹색바다가 장관이었다. 새벽녁 저 아득한 땅끝에서 돋을 볕이 떠오르면 붉은 햇살은 마치 심장에서 몸 구석구석 뻗어나가는 핏줄처럼 대지를 파고들면서 적셨다. 그러면 장대한 콩밭은 제 몸을 일으켜 넘실대기도 하고 빛줄기를 꿀꺽꿀꺽 삼키기도 하면서 쑥쑥 자라났다. 새벽비라도 내린 날이면 벌판 끝자락에 쌍무지개가 걸릴 때도 있었다.
 
그 황홀함에 넋을 잃은 김현동과 가족들은 나란히 두 팔을 벌리고 그 기운을 받아들이곤 했다.
 

연해주의 우정마을에서 바라본 지평선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 특히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워 김현동 가족은 이 풍경을 사랑했다. ⓒ 민병래


김현동은 2020년 큰 꿈을 세웠다. "지구와 사람을 살리는 (홍익인간 제세이화) 콩단백재단"을 설립한다는 것이다.
 
김현동은 2010년 러시아에서 입국금지되고 동해시에 터를 잡았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정기 배편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해주의 생산물을 국내에서 유통하던 '바리의 꿈'을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했다. 동해시에서 사회적 경제사업을 하는 동지들과 연해주콩의 가공생산을 전담할 '동북아 식품협동조합'도 만들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연해주에서 재배한 NON-GMO 콩을 들여와 압착 콩기름과 콩단백(고기)를 만들고 있다. 화학적으로 콩기름을 추출하면 독성이 있는 유기 용매를 써야 한다. 김현동은 압착 방식으로 NON GMO 콩에서 맑은 콩기름을 추출한다. 고맙게도 영월군을 비롯한 학교급식에 납품이 되기 시작했다.
 
또 지구 온난화를 줄이려면 육식과 공장식 축산을 줄여야 한다는 명제를 지금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콩단백생산에 공을 들이고 있다. 다행히 러시아는 강력한 NON-GMO 정책을 실시하고 연해주 콩은 비교적 안전하고 얼마든지 원료조달이 가능하다. 현재 포나 날개 형태로 다양한 콩단백 응용식품을 만들고 있다. 
 

콩고기 건강요리대회가 동북아시품협동조합 후원아래 1회대회가 열렸다. 압착콩기름과 콩단백고기가 김현동과 동북아시품협동조합이 가장 공을 들이는 사업이다. ⓒ 김현동제공

 
어달해변에서 한시간 가까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새해를 구상하니 볼이 얼얼하다. 어깨를 움츠리며 그는 발길을 돌렸다. 우정마을에서는 겨울이면 영하 40도가 보통이었다. 의연이와 산하는 그 추위를 견뎌내고 눈길을 헤치며 20km 떨어져 있는 우수리스크로 등하교를 했다.
 
지난 해 가을 결혼한 첫째 딸은 신혼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아내와 산하는 지금 영하 40도 추위에 웅크리고 있을 텐데 걱정이 된다.
 
2020년 3월이면 김현동이 2010년에 받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10년 입국금지조치가 끝난다. 그는 이제 연해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리라. 그래서 퀘퀘하고 군내 가득한 홀아비 신세를 떨쳐내리라.
 
동북 3성과 연해주, 남북한을 아우르는 동북아 코리안의 연대와 우정도 좋고, 콩단백으로 지구를 살리는 장대한 꿈도 좋지만 2020년에는 김현동 가족의 이산이 끝났으면 좋겠다.
 
2019년 11월16일 의연이의 결혼이후 김현동의 감동적인 인사말
지난 11월 16일 토요일 저녁 큰 딸 의연이의 결혼식을 치루었다. 내 아이들 이름은 "의연한 산하"로 할 것이라는 소위 386세대 운동권 부모의 치기 어린 의욕 하에 첫딸로 태어나고 자라난 큰 딸 의연이는 한중 통번역사 프리랜서 일을 하고 있다. 사위는 함께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만났고 역시 그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의연이는 88년 부천에서 노동조합 시작할 무렵 태어났고, 중국 연변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이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쉬꼴라(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부터는 알아서 공부했고 서 신랑도 만났다. 현지의 삶을 함께하며 고군분투했던 첫 딸의 결혼이어서 우리 가족에겐 더욱 의미가 깊었다.
 
러시아에서 둘째 딸 산하와 애들 엄마가 넘어와서 우리 가족은 4년 만에 합체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특히 둘째는 언니의 결혼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는 듯 뛰었다. 딸이 둘 인게 참 다행이고 둘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연해주 때 삶을 지켜 보아 주신 '연해주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추진위원회 ' 위원장으로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어 주시고, 지금도 동북아 시민사회 현장에서 청년으로 뛰고 계신 동아시아펑화회의 이부영 위원장님이 감사하게도 주례를 맡아 주셨다. 신랑신부가 한 경험과 공부로 이후 한반도와 대륙의 인연을 만들어 가는데 역할을 할 것을 요청하는 귀한 격려 말씀을 해 주셨다 .
 
항상 큰딸의 전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고무 격려하며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준 아이들의 할머니. 큰 아빠 , 고모. 이모 이모부 가족 등 친지 여러분들.
 
의연이 엄마 아빠의 전사를 통 털어 알고 엄마 아빠 결혼과 의연이 탄생의 과정을 남김없이 지켜 보았던 중고등 동창들, 1981년 대학 입학과 함께 시대를 함께 저항했던 성대 동문과 휴머니스트 선후배들, 강제징집생활을 함께 하며 인연을 맺었던 윤병기 형.
 
의연이가 유치원 시절 '철의 노동자'를 따라 부르던 때를 기억하는, 부천에서 작은 공장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부천지역금속노조를 만들고 함께 했던 김일섭 위원장님등 당시 조합원 동지들
 
소학교 1년때 부터 의연이의 평생 직업인 중국어를 터주고, 아낌없는 동포의 사랑을 보내 주었던 연변의 동포들. 조선족사기 피해자 협회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북한식량난을 지원하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윤정삼, 배동걸, 유미령, 고 유연산 작가의 형수님, 허명철 교수를 대신해 참석한 훌쩍 커버린 대학원생 설화. 그리고 홍매선생과 이이들. 그리고 병석에 계시지만 축하를 보내 주신 이영숙 회장님과 훈춘의 오회장님 강봉화.
 
그리고 의연이의 대학전공을 러시아어로 선택할 기회를 주었던 연해주 우수리스크 쉬꼴라(중고등) 시절. 우리 가족은 고려인 농촌 마을 만들기를 하면서 우정마을에서 보금자리를 틀었고 지금도 우리 가족과 일상을 함께 하는 러시아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의 고똘랴, 니끼다, 강마리나....
 
의연이가 앞으로 함께하며 기여하길 기대하는 순콩사회적협동조합과 동북아식품협동조합, 바리의꿈. 동해협동사회경제 네트워크 등 사회적경제로 동북아 공동체 미래를 꿈꾸는 사회적경제의 친구들..
 
이런 의연과 다양한 인연을 맺어온 분들의 진정 어린 축하 속에 결혼식은 치루어졌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나와 처와 산하는 뒷풀이에서 '의연한 산하' 노래로 감사를 대신했고, 동북아 각지에서 살아 오면서 맺은 인연들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드렸다. 다시 한번 축하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는 바이다.

 
 프로필
 
학력
• 1981 성대 사회학과 입학 휴머니스트 가입
• 1983 3월 30일 강제 연행 후 4월 2일 입대 . 28사단 보안대에서 녹화 공작
• 1985년 7월 전역
 
부천지역 노동운동
• 1985 8월 부천 노동 현장 입사
• 1986 4월 집시 및 폭력으로 구속 (사업장 근로기준법 투쟁)
• 1986 9월 출소
• 1987 7월 부천지역금속노동조합 결성 (초대 사무국장)
• 1996년 40일 동안 중국 해남 여행 북경 광주 내몽고 연변 백두산
 
중국 동북3성
• 1996년 1월 - 1999년 1월 중국 연변으로 가족 이주 ,
10월부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외협력국장.
중국조선족사기피해자, 북한식량난민 지원 사업
중국 조선족기초자료집 작성
• 1999년 1월 중국조선족상조회 결성 도중 추방
( 공식적으로는 불법 월경자 대량 장기적 지원, 국경법 40조 41조
• 1999년 7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내 재외동포 사업본부와 재외동포센터 신설 ( 사무국장)
• 2002년 조선족 사기피해자 4000명 특별 입국
• 이후 경기도교육청 협력하며 중국민족 교육 지원사업 등
 
러시아 연해주
• 1999년 5월 연해주 고려인 이주실태조사
• 2001년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 설립 ( 이후 이사, 이사장등)
연해주 고려인 동포 러시아 국적회복, 긴급구호, 한글교육센터 등 활동.
• 2004년 4월 연해주 가족이주 - 2010년
우정마을 고향마을 등 연해주 6개 고려인 농업 정착 마을 만들기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 현재 고려인 문화센터)
• 2005년 - 2010 바리의꿈 설립, 프림콩 농장 인수
고려인 정착사업으로 콩 농사 및 가공 사업 시작, 청국장, 메주, 된장, 간장 ...
• 2010년 러시아 입국 거부.
• 2010-현재 가족이 남아 한글학교 로지나서당, 바리바리생협, 콩기름 생산공장 등 운영하여 기금활동 지속.

강원도 동해
• 2010년 11월 동해 정착, 바리의꿈 동해 이전
• 2013년 바리의 꿈 협동조합 ( 두유, 두부)
• 2012년 동북아포럼 (환동해 코리아 시민단체) 결성 참여 ( 2회 대표),
2019년까지 매년 동북아한민족유소년축구대회 개최 ( 연변, 연해주, 일본 코이안 초등생.)
• 2016년 연해주 콩 압착콩기름 인력양성 및 시험생산
• 2015년 동해사회적기업협의회 창립 (대표)
• 2018년 3월 동북아NonGMO압착가공사회적협동조합 발기( 발기대표)
10월 순콩사회적협동조합 결성(이사)
• 2018년 10월 동북아식품협동조합 결성 (이사 및 경영대표 /콩기름 콩단백 생산공장 생산공장)
• 2019년 연해주와 동해에 각 콩 1000톤 압착 가공 시스템 구축
 
못다 한 이야기

1. 연해주동북아 평화기금과 발맞추기 위해서 2005년 국내에 '바리의 꿈'이 세워집니다. '바리의 꿈'은 국내에서 연해주생산물을 한국시장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후 사회적기업으로 다시 동해시에서 '동북아식품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산파역할을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http://www.baridream.co.kr/shop/main/index.php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김현동 선생은 활동과 개인사를 늘 페이스북에 잔잔하게 기록합니다. 그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https://www.facebook.com/kimhyundong62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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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