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3 18:56최종 업데이트 20.02.2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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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보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의 비관을 발판 삼아 조금씩 진보해왔습니다. 때때로 퇴행을 반복했을지라도요. <오마이뉴스>가 20년 전 사건을 지금 되돌아본 이유입니다. 오늘은 비관하되, 내일을 낙관하려는 의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편집자말]

2000년 2월 10일 <서울신문>에 실린 기사 ⓒ 서울신문


20년 전 한 일간지는 신인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을 소개하며 다소 아리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코미디와 공포, 미스터리가 어우러져 있는가 하면 판타지적인 요소도 눈에 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로 녹아들지 못한 채 소화불량 양상을 보인다."

개가 등장한 것 말고는 별다른 관련도 없으면서 동화의 제목을 갖다 쓴 것 또한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2000년 2월 10일자 한 신문에 언급된 이 영화의 제목은 <플란다스의 개>, 감독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봉준호다.

지금 봉준호는 도통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아리송한 장르로 한국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벌레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데 제목이 '기생충'인 바로 그 영화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아래 오스카상)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2020년 2월 10일(한국 시각), 위 기사로부터 정확히 20년 후의 일이다. 언론에서 혹평 받던 신인이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감독으로 우뚝 선 것이다.  
 

지난 2월 10일(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했다. ⓒ AP-연합뉴스

 
그가 '세계적 감독'임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봉준호라는 인물의 성공스토리는 물론이고 변화의 과정 역시 다양한 채널을 통해 나오고 있는데, 나는 그의 지난 역사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감독 봉준호는 데뷔 후 지난 20년간 변하지 않았다. 햇병아리 때나 거장이 된 지금이나 상업적 성공과 실패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자신의 개성이 담긴 작품을 내놓는 일에만 집중해왔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봉준호니까 그런 실험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플란다스의 개>로 갓 데뷔한 2000년부터 지금까지를 돌아보면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적 요인, 주위 평가와 관계없이 오롯이 지켜온 봉준호의 DNA를. 영화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철학을.

[봉은 변하지 않았다 ①] 지하실에서 피어난 감각
 

영화 <기생충>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 며칠 전, 봉준호는 현장을 찾은 몇 명의 취재진과 티타임을 열었다. 비보도가 전제인 만남이었는데, 시간이 꽤 지난 이제는 어느 정도 말해도 될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온갖 은유와 상징의 향연이었지만, 일상의 봉준호는 꽤 재기발랄한 입담꾼이기도 했다. 

당시 봉준호는 영화의 아이디어 원천을 설명하면서 어린 시절 서울 잠실 장미아파트에서 겪은 일화를 꺼냈다. 그가 청소년기에 살았던 곳이다.

"아파트에 눅눅하고 축축한 지하실이 있었다. (중학생 때) 친구가 별로 없는 외톨이여서 거기에서 종종 놀았는데, 가보면 경비 아저씨가 밥 해먹은 흔적들, 온갖 잡동사니들, 버려진 침대도 있었다. 그 침대에서 경비 아저씨가 (어떤 여성과) 밀회한 흔적도 있더라..."

<기생충>의 핵심 배경인 반지하뿐만 아니라 <괴물> 속 그 괴물이 뼈를 토해내던 보금자리도 축축한 지하 하수구였다. 수직과 수평을 오가는 봉준호의 카메라 워크는 대부분 그가 직접 보고 만진 아파트 지하실의 이미지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마더> 속 김혜자에게 '국민 엄마' 이미지가 아닌 '도준(원빈)이 흠모했을 섹슈얼(sexual)' 요소를 입힌 것도, 그때 경비 아저씨의 '다중성'을 일찌감치 훔쳐본 어린 봉준호의 기억 일부가 작용한 결과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지울 수 없는 기억 혹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긍정적 경험이든 부정적 상처였든 그것들은 삶에 영향을 미친다. 봉준호는 그런 기억을 흘려보내지 않고 집착하는 쪽이었다.

여러 인터뷰에서 그가 밝혔듯이 <괴물>은 1986년과 1987년 사이, 어린 봉준호가 창문으로 잠실대교를 바라보다 "똥 덩어리 같은 시커먼 물체가 교각을 올라가는 모습"을 본 게 뿌리였다. 약 20년 전의 영감을 잘 간직했다가 작품으로 빚어낸 것이다.
 

영화 <마더>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마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가. 햇살이 수평으로 관통하는 관광버스 안에서 김혜자가 홀린 듯 춤을 추는 모습 역시 어렸을 때 관광버스에서 춤추던 아줌마들에 대한 기억에서 태어났다. <기생충> 속 기우(최우식)가 부잣집에서 과외를 하다 기정(박소담)을 끌어들이는 장면 또한 그가 학부생 시절 경험했던 고액 과외에서 비롯됐다(지금의 아내이자 당시 여자친구가 먼저 과외를 하다 봉준호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다소 소심하거나 내성적이었던 소년이 본능적으로 느꼈던 세상의 이면들은 그렇게 예술이 됐다.

[봉은 변하지 않았다 ②] 고도의 줄타기

아파트 지하실과 아버지(그래픽디자이너, 영화 자막작업 등을 해 온 봉상균 교수) 서재를 오가며 온갖 잡동사니와 사진집을 탐닉했던 그는 12살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이다. 

그의 꿈이 현실로 되는 데는 약 10년이 걸렸다. 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제대 후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한다. 그때 만든 첫 단편 영화가 <백색인>(1993)이다. 사람 손가락을 우연히 주운 회사원(김뢰하)의 하루를 그린 이 작품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본격적으로 영화의 매력을 느끼고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 입학해 만든 5분짜리 단편 <프레임 속의 기억들>과 졸업작품인 단편 <지리멸렬>(1994)도 그랬다. 특히 사회 엘리트층을 풍자한 <지리멸렬>이 이후 밴쿠버국제영화제와 홍콩영화제 초청을 받자 국내 평단에서도 신인 봉준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졸업 직후 박종원 감독, 박기용 감독의 연출부에서 일해온 봉준호는 당시 굴지의 제작사였던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의 권유로 상업영화 감독 데뷔 코스를 밟게 된다. 각색하던 두 편의 영화가 제작 중 무산됐는데, 그리고 나서 찾아온 기회가 바로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였다. 결과는 전국 관객 10만 명. 칭찬도 있었지만 '상업영화 감독으로 변신이 요구된다'는 비평도 나왔다. 분명한 건 코미디와 스릴러를 오간 이 작품에 사회 풍자 요소가 가득했다는 사실. 그 역시 자기만의 스타일이 첫 상업영화에도 녹아나길 원했던 것 같다.

"내용이나 스타일이 나의 단편 연장선에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농담처럼, 낄낄거리며 보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 뼈와 가시가 있는. 평소 나의 이야기 스타일도 그렇다. 웃기고, 슬프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코미디'가 아닌 특이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 2000년 2월 11일자 <한국일보> 기사 중
 

영화 <플란다스의 개>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2000년 4월 30일 제1회 전주 국제 영화제에 <플란다스의 개> 감독으로 참석한 신인 봉준호. 배우 배두나도 함께했다. ⓒ 전주국제영화제/최우창

 
동시에 내적 고뇌가 큰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충무로의 감독이 되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계속 독립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상업영화이지만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그 사이 어딘가를 추구하는 딜레마 또한 현재까지 봉준호 영화의 정체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스스로 장르 감독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장르를 '물 먹이는 사람'이라고 수차례 설명해왔다. 또한 '삑사리의 영화'라고 자신의 작품을 명명하기도 했다. 엄중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주요 캐릭터들이 발을 헛디디든지 미끄러진다든지 하는 장면은 이제 봉준호 영화의 시그니처(signature)가 됐다. 해외 평단에선 이미 '봉준호 장르'라는 표현을 만들었고, 본인도 이를 굉장히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첫 상업영화는 쓴맛을 봤지만 이후 그는 잘 알려졌다시피 흥행에 연달아 성공한다. <살인의 추억>(2003)은 청룡영화상(한국영화 최다관객상) 등 각종 국내 상을 휩쓸었고, <괴물>(2006)은 누적 관객 천만을 돌파했다. 국내 영화계의 뉴웨이브로 급부상한 봉준호는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는다. 그는 거절했다. 

"크리에이티브(creative)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할리우드가 우리보다 더 크리에이티브 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꼭 할리우드에서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할리우드 시스템은 아무리 감독이 훌륭해도 영화사(제작사)가 최종편집권을 갖는다. 그걸 넘겨주고, 굳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궁금하긴 하지. 과연 날 원하는 이유가 뭔지." - <맥스무비> 42호 중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방어선과 자신의 호기심 사이에서 적절한 합의점을 찾은 게 바로 <옥자>(2017)다. 가상의 동물이 전체 분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기에, 500억 원대 초고예산이 필요한 영화였다. <옥자>는 글로벌 스트리밍 업체인 넷플릭스의 전액 투자로 완성됐다. 봉준호는 넷플릭스에 온전한 편집권을 요구했고, 넷플릭스는 받아들였다.

40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전작 <설국열차>(2013) 또한 글로벌 프로젝트였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전자는 전액 해외 자본, 후자는 순수 국내 자본(CJ ENM)이었다는 것.
 

지난 2017년 6월 14일 오전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영화 <옥자> 기자회견에서 배우 변희봉, 틸다 스윈튼, 안서현, 스티븐 영,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다니엘 헨셜과 봉준호 감독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제70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옥자>는 비밀을 간직한 채 태어난 거대한 동물 옥자와 강원도 산골에서 함께 자란 미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이정민

 
<기생충> 인터뷰 당시 봉준호는 "<설국열차> 때 반농담으로 국내 스태프들에게 욕을 좀 먹었다"고 털어놨다. 한국 상업영화 평균 제작비(약 80억 원)를 훌쩍 뛰어넘는 거액이 투자되는 바람에, 다른 영화들의 제작이 미뤄지거나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감독 입장에선 돈을 대주는 주체가 누구든 잘 받아서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만, 이 무렵부터 봉준호는 국내 영화 산업과 해외 영화 제작 시스템의 차이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기생충> 기획 때 중요했던 요소 중 하나로 "내 손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예산 규모"를 꼽았을 정도니 말이다. 

<설국열차>와 <옥자> 등 글로벌 프로젝트를 경험한 그는 자신이 충분히 조율할 수 있는 예산 규모를 <기생충>에 적용한 셈이다.

<옥자> 때 또 하나의 일화. 취재진을 만난 봉준호는 또 다른 넷플릭스 콘텐츠를 즐기는지 묻는 물음에 "사실 TV시리즈를 잘 보지 않는다"며 솔직하게 답했다. 오히려 그는 "넷플릭스에 스탠리 큐브릭(봉준호가 존경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의 모든 작품이 다 올라와 있더라, 4K 화질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며 "박정범 감독의 <산다>가 넷플릭스에 있어서 봤는데 정말 재밌게 봤다, 인디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국내외의 기대를 모은 뒤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으로 떠들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로컬 행사잖나"라며 적절히 풍자한 건 그가 외형의 성과보단 영화의 본질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0년 전 상업영화 데뷔를 앞둔 풋내기 봉준호와 지금의 봉준호가 연결돼 보이지 않는가. 거대 글로벌 프로젝트를 두루 경험하면서도 그는 꿈의 원천인 고전 영화와 한국 독립영화를 향한 애정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산업의 규모까지 고민하면서도, 사회 구조와 자본주의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봉은 변하지 않았다 ③] 그가 사람을 대하는 법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동료를 대하는 봉준호의 애정과 염치다. 그가 출연진을 캐스팅할 때 해당 배우의 작품을 모두 섭렵한다는 건 이제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송강호가 무명시절 오디션에서 떨어졌을 때 '언젠가 꼭 함께 하고 싶다'는 삐삐 메시지를 남긴 것, <옥자> 때 제이크 질렌할을 섭외하는 자리에서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이 애정하는 본인 출연작)를 언급하며 배우를 놀라게 한 일은 봉준호라는 사람을 잘 드러내는 일화들이다. 

데뷔작을 찍을 때는 출연을 주저하던 변희봉을 설득하기 위해 변희봉의 필모그래피를 줄줄 외웠다. 그보다 훨씬 앞서 가난한 학부생 시절 <백색인>을 찍을 때는 주연 김뢰하에게 아버지 와이셔츠 상품권을 빼돌려 출연료로 지급한 일화도 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의 봉준호를 만든 요소라고 생각한다.
 

아카데미상 수상 발표후 기뻐하는 봉준호 감독 ⓒ CJ엔터테인먼트


지난 92회 오스카상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봉준호였다. 국제영화상, 각본상, 감독상, 그리고 최고상인 작품상까지 받았다. 한국영화 101년 역사상 최초 오스카상이면서 92년 오스카 역사상 최초의 비영어권 영화의 작품상 수상이다.

이 와중에도 봉준호는 수상 소감을 발표하며 같이 후보에 오른 마틴 스콜세지와 쿠엔틴 타란티노를 언급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말을 남긴 마틴을 존경한다고, 미국인들이 한국 영화를 잘 모를 때부터 자신의 작품을 언급해준 쿠엔틴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며, 영화를 처음 꿈꿨던 그 시절의 기억을 나눴다. 봉준호다운 모습이다.

그렇기에 봉준호는 변하지 않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생물학적으로는 나이가 들었을지언정 영화적으로 그는 변화가 아닌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달라진 건 그의 무대일 뿐이다.  
 

ⓒ 이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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