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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2.30 17:08 수정 2020.01.06 18:22
 

지난 10월 28일 방문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로 사용됐다. 크기가 작고 낡았으며 옆에는 옷가게들이 즐비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 유지영

 
나는 10월 28~31일까지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직원공제회, <오마이뉴스>와 함께 중국으로 역사탐방을 가게 되었다.

첫 번째 탐방지는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있는 홍커우 공원이었다. 기념관은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2층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관련된 영상을 시청할 수 있었다. 25살에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하며 윤봉길 의사님의 용기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25살은 아주 어리고 하고 싶은 것을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윤봉길 의사는 25살이었고 그 분 역시나 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와 후손과 아들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굳이 독립운동이라는 길을 선택한 25살의 윤봉길 의사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한 분을 더 알게 되었다. 백정기 의사라는 분인데 윤봉길 의사 의거 당일 거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한다. 실패하셨지만 그 목적은 모든 독립운동가와 동일했고 그 마음가짐까지 동일했다. 백정기 의사의 설명을 들으니 알려지지 않은 많은 무명의 독립 운동가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우리나라를 발 벗고 나서서 지켜주신 분들인데 한 명이라도 잊지 않으려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탐방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였다. 민가에 위치해있어서 주민 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아주 조용히 움직이려 노력했다. 안에는 촬영이 금지되어있어 내부 모습은 기억으로만 떠올릴 수 있지만 김구 선생님의 사무실과 마네킹들로 재현된 그 때의 상황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아서 그 당시를 느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임시정부가 있는 골목은 보존하기 위해 개발을 전혀 하지 않아 엣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주변 골목들은 화려한 옷 가게들이 즐비했다. 중국과 그곳 주민들은 그 골목까지 개발하고 싶었겠지만 우리나라의 임시정부이자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 지켜준 것 같아 고마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임시정부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그곳을 끝까지 잘 지켜냈으면 좋겠다.

그리곤 영경방을 보았다. 유럽의 문화를 많이 받은 중국이라서 유럽풍의 건물들과 인테리어들이 많았다. 김구 선생님이 이곳에서 가족들과 잠시 생활하셨다고 한다.

좋은 시민이 되기를

다음 날 아침부터 송경령능원으로 출발했다. 송경령 능원에는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모셔져 있었다. 한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의 유해는 모두 옮겨져 그곳에는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이 적혀진 비석들만 남겨져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은 아주 많았다.

그 분들의 이름 옆에는 우리나라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지만 알지 못 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 분들이 지켜준 나라에 살면서 이름조차 몰랐던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 분들을 기리며 묵념을 하는 시간도 가졌고 다시금 죄송해졌다.

다음으로는 상하이에서 자싱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요원들의 주거지에 들렀다가 김구 선생님의 피난처에 갔다. 김구 선생님은 그곳에서 여자 뱃사공인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을 하며 피신해계셨는데 주애보는 죽을 때까지도 김구 선생님이 독립 운동가인지 몰랐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님의 굳센 마음가짐을 또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항저우 임시정부에 갔지만 공사 중이라 관람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임시정부가 여러 개라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처음 알게 되었다. 사흠방과 오복리를 갔다가 저녁식사 후에 방학진 선생님이 1시간 동안 역사 강의를 해주셨다. 역사 강의는 따분하다고 생각하던 내 관념이 아닐 수도 있구나 하며 깨지는 순간이 될 정도로 재미있고 내용들이 귀에 잘 들어오는 신기한 강의였다.

기억에 남는 게 너무 많아서 몇 가지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먼저 망명과 여행의 차이이다. 망명은 돌아오지 못하지만 여행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독립 운동가들은 후손들을 위하여 망명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정말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3.1운동 하면 누가 생각나나요?"에서 시작하였다. 우리는 당연하다시피 유관순을 외쳤고 방학진 선생님께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아냐고 다시 질문하셨다. 나는 3.1운동 얘기하다가 아무 관련 없는 안창호 선생님은 왜 나오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독립을 위해 많은 학교를 세운 걸로 들은 적이 있기에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안창호 선생님은 아무 관련 없지 않았다. 3.1운동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셨다. 이제부터라도 3.1운동 하면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기억나는 것 같다.

그리고 끝으로 방학진 선생님은 좋은사람(good person)이 되어도 좋지만 좋은 시민(good citizen)이 되도록 하자고 하셨다.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의 차이는 좋은 사람은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좋은 시민은 좋은 정치체제를 전재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좋은 시민이 되자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압록강 행진곡을 부르며 '우리는 한국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라는 아주 굳센 모습이 보여지는 가사로 존경스러운 한국광복군이자 같은 민족이 우리나라를 지켜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다음 날은 무려 4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달려서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라는 긴 이름을 가진 곳에 도착했다. 정말 산 속에 자리해 있는데 길이 많이 좋지 않고 가팔랐다. 험난하게 도착한 곳은 험난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전에 다녀온 단체에서 길을 바로 갈 수 있도록 리본으로 표시도 해주고 바람개비로 꾸며주기도 하고 '5분만 더'라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처음 산길을 들어오는 입구가 무슨 건물 뒤쪽에 비밀스럽게 있는데 버스가 그 건물 앞에 정차해서 그 건물이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인줄 알았다. 산길을 들어오는 입구 쪽에 있는 담벼락에 김포청소년문학탐구단이 이곳이 천녕사(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라고 표시해두지 않았더라면 찾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그곳을 널리 알리고 안내판도 생길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서 우리 단성중도 흔적을 남기기로 했다. 목에 걸고 있던 이름표에 우리들의 이름을 써서 그 분들을 기억하고 '코레아 우라!'같은 문구를 남겼다.

기억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난징대학살기념관 앞에 있는 동상. 엄마가 죽은 아이를 움켜쥐고 절규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난징대학살의 끔찍함을 잘 보여준다. ⓒ 유지영

 
다음 탐방지는 가장 기억에 남던 난징대학살 기념관이다. 들어가기 전부터 커다란 조각상이 보였는데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말라서 갈비뼈까지 보이며 축 늘어진 채 죽은 아이를 안고 원망하듯이 하늘을 보는 모습이었다.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관람하면서 많은 상들을 볼 수 있었는데 하나도 빼지 않고 전쟁의 처참함을 고스란히 담은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생동감까지 생생해서 그 당시 끔찍했던 상황을 아주 잘 느낄 수 있었다. 인상이 찌뿌려지고 가슴이 아팠다. 어려보이는 남자아이가 더 어린 자신의 동생의 조막만한 손을 붙잡고 달리는 모습, 이미 죽어 쓰러져있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갓난아이의 모습, 다급하게 기어서 도망가는 노인의 모습 등등. 전쟁을 직접격지는 않았지만 끔찍하고 슬픈 일이라는 것을 아주 강하게 알게 되었다.

난징대학살을 포함하여 일제강점기를 격어본 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 분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안정적인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에는 크게 '300,000'이라고 쓰여져 있는 벽이 있는데. 30만, 불과 40일이라는 기간 동안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중국인들의 수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군 두 명이 누가 중국인을 가장 많이 죽이는지 내기를 했었다는 일이다. 기념관 내부에 이 내용을 담은 신문 한 면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신문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고작 내기의 승부보다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숨은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고 책상에 앉혀서 다시 공부시키고 싶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날, 남경 위안소에 갔다. 그곳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것이 그림과 같은 조형물이다. 소녀들이 만삭인 모습을 하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 당시 어린 소녀일 뿐이었던 할머니들의 안타깝고 화가 나는 상황들을 보며 일본군의 잔혹함을 되새겼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 할머니가 계시는데, 위안소에서 도망을 나왔지만 그때의 일이 너무 가슴 아프고 속상해서 계속 우시다가 시력을 잃으신 할머니셨다. 그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동영상을 보면 시력을 잃으신 할머니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흘리시며 말을 하신다. 위안소 주변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아마 현무암 같은 돌들이 줄줄이 둘러싸고 있다. 이 돌들은 끔찍한 일을 당했던 소녀들의 깊게 파여 버린 마음의 상처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들의 심정을 기억하고 증언해주신 할머니들의 용기에 감사를 표한다.
 
이번 역사탐방을 할 때, 방학진 선생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역사는 기억하려는 자들과 잊게 하려는 자들의 싸움이다." 나는 기억하려는 자가 되어 잊게 하려는 자들로부터 역사를 지켜낼 수 있도록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가지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홍예인님은 단성중학교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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