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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15 14:09 수정 2019.11.15 14:09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한 삽질은 금방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공식적인 휴식시간이 없으니 알아서 요령껏 쉬어야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간에 헌병들이 총을 들고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니 말이다. 박태분은 이장의 호출에 따라 같은 마을 사람 십여 명과 함께 구덩이 파기 부역에 동원되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어이, 태분이. 쉬엄쉬엄하게" 옆에서 일하던 기철이 하는 소리다. 박태분은 못 들은 체하고 묵묵히 삽질만 해댔다. "저 놈은 뭔 일을 저리 열심히 하는 거유?" 박태분 집안 사정을 모르는 옆 마을 사람이 오기철(가명)에게 하는 말이다.

"쉿! 태분이한테 암말 말어. 속이 문들어질껴."
"왜유?"
"태분이 동생이 까막소(감옥)에 있쟎어."
"야? 그럼 시방 태분이 쟈가 제 동생 묏자리를 파는 규?"


동생 묏자리를 판 청년
 

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기록 사진. ⓒ 미국립문서보관소

 
그랬다. 박태분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동생 박태화를 6.25가 터지기 3개월 전에도 면회를 했었다. "야, 이제 6개월만 참어라. 나오거든 딴 생각일랑 말구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살어" "알았슈 형님"하는 동생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던 그였다. 그런데 석방 3개월을 앞둔 동생의 묏자리를 판다고 생각하니, 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6.25 난리가 터지자마자 헌병들과 경찰들이 마을로 들이닥쳐 "청년방위대원들하고 젊은 놈들은 전부 모여"라며 닦달했다. 청년방위대원이었던 박태분도 당연히 군인과 경찰들에게 이끌려 마을 인근의 산내 골령골 현장으로 갔다. 군인 인솔자는 부하들을 몇 군데 세워놓고 "저기 사방에 서 있는 군인들 위치가 당신들이 파야 할 지점이다. 깊이는 허리까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인솔 군인은 "시끄러워! 당장 시작한다. 실시"하며 명령을 내렸다.
 
난리 중에 군인이 시키는 일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박태분을 포함한 50여 명의 젊은이들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구덩이 크기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가로 50m 세로 1m80cm의 크기였으니 말이다. 하루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커다란 구덩이를 여섯 개나 파야 했다.

박태분의 몸살은 작업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작업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군인들의 다그침에 이장은 샌드위치가 될 판이니, 이장한테 하소연해도 헛일이었다. 박태분의 사정을 아는 이장도 혀만 끌끌 찰 뿐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을 청년 전부를 동원하다시피 하니 개인 사정을 봐주는 건 불가능했다.

며칠 걸려 구덩이를 다 파고 나니 군인들이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돼"라고 했다. "내일부터 총질을 할라부네"하며 청년들이 수군댔다.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박태분은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동생의 묏자리를 판 거나 다름없으니, 속이 문드러졌다. 그야말로 박태분 집은 초상집이었다. 며칠을 누워 있는데 이웃이 왔다. 왕이분(1927년생)이었다.

"골령골에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다는데, 울 오빠도 죽었겄지유?"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던 박태분은 왕이분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속이 답답해 찾아 온 왕이분도 그의 모습을 보자 더 이상 물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종일 울어 눈이 퉁퉁 부은 왕이분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1950년 7월 초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에 이웃해 있던 부사동 마을의 풍경이었다.
 
동생의 묏자리를 판 줄 알고 열흘을 끙끙 앓았던 박태분은 후일 동생 태화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형님 잘 계셨어유"라는 동생의 말을 듣고도 태분은 눈만 껌벅였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박태화는 천만다행으로 학살 대열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여름 난리가 지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이분의 오빠 용순(1925년생)은 학살 대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목수 형제의 생과 사

왕용순이 형과 함께 대전경찰서로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모두가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평범한 목수 형제인 이들은 사찰과 조사를 받은 뒤 각각 생과 사의 길을 걸었다. 형 왕재순은 경미범으로 분류되어 석방되었고, 동생 왕용순은 며칠 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어째 동생은 안 오냐?"
"예, 그렇게 됐어요. 금방 나오겠죠."


큰형 왕의순은 동생 재순의 이야기를 듣고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용순은 형들을 따라 시골을 다니며 집 짓는 일을 하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다만 사돈 집안 형제들의 영향을 받아 좌익 모임에 한차례 참석한 적이 있었다. 마을 뒷동산에 한번 오른 것뿐이었는데 그게 비극의 시작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용순이 그렇게 산내 골령골에서 처형된 후 왕씨 집안의 불행은 이어졌다. 왕의순은 아내와 함께 처가 마을 논산으로 피난 간 후 그곳에 정착했다. 재순은 피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대전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난리 통에 동생이 학살된 것도 억울한데, 이번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받아 영등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막냇동생 용순이 골령골에서 죽고, 바로 밑의 동생이 영등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자, 큰 형 의순은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그래서 대전 집을 헐값에 팔고 논산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경찰의 눈초리는 논산까지 이어졌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당시는 이른바 3인조·6인조 선거가 극에 달했었다. 유권자 3명 혹은 6명이 조를 이루어 투표를 한 다음 조장에게 투표용지를 보여주고 투표함에 용지를 집어넣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당이 아닌 다른 정당에 투표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왕의순은 용기 있게도 민주당에 기표를 하고 조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렇잖아도 빨갱이 집안으로 호가 났는데, 자유당 정권 시절에 민주당에 표를 던졌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왕의순은 이후 한동안 경찰서 사찰계의 감시를 받았다. 필적이 좋았던 매제가 지서에서 '관찰보호자카드'를 정리할 때의 일이었다. 지서에서 손목이 부러져라 카드를 작성하는데 그의 눈이 순간 왕방울만 해졌다. 처남 왕의순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왕의순은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로, 간첩이 남파되면 위 자(者)를 접선할 가능성이 높음."

이렇게 붉은 글씨로 쓰여 있는 게 아닌가. 끔찍한 일이었다. 간첩이 남파되면 접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처남을 사시사철 감시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집안을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어 놓고, 사돈에 팔촌까지 감시의 올가미를 씌워 놓은 것이었다.
 
촉감으로만 남은 삼촌
 

증언자 왕상묵 ⓒ 박만순

 
동생의 허망한 죽음에 낙심하고 논산에서 살던 왕의순 가족에게 빨갱이 가족이라는 올가미는 평생 벗겨지지 않았다. 왕의순의 장남 왕상묵(1948년생)은 얼굴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삼촌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다. 삼촌 왕용순은 왕상묵을 안아 "우리 상묵이 귀엽구나"라며 연실 싱글벙글했다. 무등도 태워 주고, 업어주었다.

그렇게 삼촌의 사랑을 독차지한 왕상묵(73,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2동)은 고달픈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막내삼촌에 이어 둘째 삼촌도 고초를 겪자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다. 왕상묵은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했다.

저학력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산 전신전화국에 임시직으로 취업했다. 맨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서 전선 작업을 하는 일이었다. 고된 직장생활을 1년 했을 때였다. 인사담당자가 "그만 나오게"라고 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라며 의아해하자 그는 "사람 입장 곤란하게 하지 말고 그만 나오게"라는 것이 아닌가. 막내 삼촌 때문에 그런가보다, 짐작은 했지만 너무나 억울했다. 거기에서 좌절할 수는 없었다.

1978년에 우편집배원 시험에 응시했다. 합격해 논산과 부산우체국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왕상묵은 제2의 삶에 도전했다. 우편집배원보다는 안정되고 나은 삶을 원했던 것이다. 군속 행정직 5급 시험에 도전했다.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군에서 25년을 근무하고 퇴직했다. 

이제는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었다. 남은 인생에서 꼭 해결하고 싶은 일이 있다. 막내 삼촌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다.
 
왕상묵의 삼촌 왕용순의 명예회복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왕용순을 비롯한 수천 명의 죽음구덩이를 파야만 했던 인근마을의 청년방위대원과 주민들의 마음의 상처는 누가 어루만져 주어야 하나? 그들도 국가폭력의 피해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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