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05 16:41최종 업데이트 20.01.06 18:30
  • 본문듣기
  

지난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 동안 태준이를 비롯해 거제와 서울에서 모인 30여 명의 청소년, 10여 명의 선생님과 함께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중국에서 진행했다. 오른쪽 덩치 큰 소년이 15살 태준이다. ⓒ 임정로드 탐방단

 
"야구만큼은 일본에 절대 지지 않을 거예요."

경남 거제에서 올라온 태준이가 '임정로드' 여정 마지막 날에 기자에게 밝힌 말이다. 그러면서 태준이는 "일단은 국가대표가 되고 나서요"라고 덧붙였다. 15살 소년인 태준이는 야구 유망주다. 중학교 2학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좌투로 130km 이상의 공을 던진다.


그는 상하이부터 자싱, 항저우로 이어지는 여정 내내 힘이 넘쳤는데 임정로드 탐방 마지막 도시인 난징에 와서는 시종일관 차분한 눈으로 김원봉과 125명의 청년들의 회한이 서린 천녕사를, 김구가 고물쟁이 행세를 하며 버틴 회청교를, 중국인 30만 명의 한이 서린 난징대학살기념관을, 우리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와 능욕을 당한 리지샹위안소를 마주했다.

기자는 지난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 동안 태준이를 비롯해 거제와 서울에서 모인 30여 명의 청소년, 10여 명의 선생님과 함께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중국 현지에서 진행했다. 기자는 <임정로드 4000km>와 <약산로드 7000km>를 집필했다는 이유로 해설사로 동참했다.

"이육사의 영혼이 깃든 곳, 조선혁명간부학교"

지난달 16일 오후 임정로드 탐방단은 상하이와 자싱, 항저우를 거쳐 난징에 들어섰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김구를 비롯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사들은 '대한민국'이 탄생한 상하이를 뒤로하고 '대장정'을 시작했다. 윤 의사의 의거로 침략군의 수뇌부를 잃은 일본이 우리 지사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압박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상하이 바닥에서 조선인이라면 눈에 보이는 대로 잡아들였다. 이때 도산 안창호 선생이 붙잡혔다. 지사들은 더 이상 상하이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웠다.

임정로드 대장정도 이 길과 같은데, 상하이에서 시작된 여정이 자싱과 항저우, 난징으로 이어진다. 종국에는 창사와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5년 8월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한다. 김구를 비롯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사들은 1935년에야 난징에 자리를 잡았다.
  

의열단 시절 김원봉. 우측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에 앞서 난징에 자리를 잡은 인물이 있었으니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단체인 '의열단'의 의백(단장)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조국 광복은 오직 우리 손으로 만든 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신념을 갖고 1918년 중국 망명 이후 시종일관 군대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이어갔다. 그 결과가 1932년 7월 난징 외곽에 마련한 조선혁명간부학교다. 이 학교에서 125명의 조선청년들이 군 간부로 거듭났다. 대표 인물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시인 이육사다.

이육사, 흔히들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육사의 직업은 독립투사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부터 애국지사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일보 대구 주재 기자로도 잠시 활동했지만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기자 시절 친분을 쌓은 석정 윤세주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를 난징으로 이끈 것이 영화 <밀정>에서 영화배우 공유가 연기했던 의열단원 김시현이다.
  

이육사의 청년 시절 모습, 우측 안경 쓴 이가 이육사다. ⓒ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는 이듬해인 1933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7월에 국내로 잠입한다. 하지만 34년 3월 이 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구속된다. 육사는 독립운동가로 살아가는 내내 17번 투옥됐고, 마지막 투옥에서 건강이 악화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이었던 동창후통에서 순국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의 일이다.

애석하게도 육사가 훈련했던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 장소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어디인지 모른다. 조선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 정율성이 몸 담았던 2기 훈련장소 역시 마찬가지다.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다. 3기가 훈련했던 장소인 '천녕사'만 폐허가 된 채로 남아있다. 이 천녕사마저도 지금은 난징 시내에서도 차로 한 시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갈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단체로 버스를 대절하거나 택시를 종일 빌려 이용해야 한다.

폐허로 전락한 이곳에서 조선 청년 44명이 모여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투사가 됐다. 이육사와 정율성이 훈련받은 1기와 2기 생도를 합치면 총 125명의 조선 청년들이 1930년 대 초중반 난징까지 와서 훈련을 받고 장교가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열다섯 학생들이 올린 술 한 잔"
  

지난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 동안 태준이를 비롯해 거제와 서울에서 모인 30여 명의 청소년, 10여 명의 선생님과 함께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중국에서 진행했다. ⓒ 김종훈

 
천녕사로 오르는 산길을 따라 태준이를 비롯해 학생들은 걸음을 이었다. 망설임이 없다. 생각해보면 이 자체로 역사의 발전인데, 2017년 기자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천녕사는 정말로 '폐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은 천녕사 입구에 형형색색의 바람개비도 세워졌다. 오르는 길에는 이름 모를 학생들이 붙여놓은 알록달록한 안내종이도 있다. 무엇보다 천녕사 초입에 아무런 표식 하나 없던 것이 지난 7월 '김원봉, 정율성, 이육사, 윤세주가 활동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붙었다. 모두 학생들이 한 일이다.

하지만 힘찬 발걸음도 함께 산에 오른 지 10여 분이 지나면 잠잠해 진다. 폐허가 된 천녕사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천녕사에 새겨진 '독립운동'의 의미를 전했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당시에 일본어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조선청년들이 이곳까지 와서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구체적인 이유야 모두 다르지만 이들의 목표만큼은 동일했어요. 조국독립.

일제에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청년들이 나라 찾겠다고 모든 걸 걸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 놀랍죠? 그런데 질문 하나 할게요. 졸업생이 125명인데, 이중 우리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육사를 제외하면 다들 모를 겁니다. 왜 기억하지 못할까요? 저도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어요.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이들을 위해 여러분들이 술 한 잔 올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태준이가 천녕사 담장에 차린 제사상에 다가와 가장 먼저 술 한 잔을 올렸다. 무릎을 꿇은 채 잔을 받고 술을 올렸다. 그리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드렸다. 15살 태준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태준이는 술을 올린 뒤 그저 멋쩍게 웃기만 했다. 태준이가 따르자 다른 소년들도 걸음을 이었다. 다들 특별한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술 한 잔 올리는 것으로 마음을 다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 훈련지 터 천녕사 ⓒ 김종훈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 훈련지 터 천녕사 ⓒ 김종훈

 
"고물쟁이 김구가 살던 곳"

탐방단은 헛헛한 마음으로 천녕사를 내려와 난징 시내로 향했다. 그곳에는 30만 명이 학살당한 기록과 기억을 집약한 난징대학살기념관이 있다. 탐방단은 놀랐다.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연인,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곳에 입장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인 가이드 이명 선생은 "중국에서는 이곳을 대학살기념관이 아닌 대도살기념관이라 부른다"면서 "일본은 1937년 12월부터 한 달 동안 하루에 1만 명씩 30일 동안 중국 국민을 죽였다. 그것이 학살이 아닌 도살인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난징대도살기념관'이 만들어진 이유를 덧붙였다.

"힘이 없어서 당한 일이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중국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역사의 사실을 마주하고 또 마주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모든 내용이 설명돼 있다. 당사자들도 직접 와서 사실을 보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거다. 일본 사람들이 꼭 와야할 장소다."
 
 

지난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 동안 태준이를 비롯해 거제와 서울에서 모인 30여 명의 청소년, 10여 명의 선생님과 함께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중국에서 진행했다. ⓒ 김종훈

 
묵직한 역사의 사실 앞에 쉴 새 없이 떠들던 태준이도 말을 잃었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침략과 전쟁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보는 시간이 됐다. 탐방단은 대학살기념관을 뒤로하고 회청교로 향했다.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의 의거 이후 김구는 지금 가치로 200억 원의 현상금이 걸린 독립운동가 됐다. 회청교는 김구가 난징에 머물 당시 거주했던 집터가 있던 곳이다. 김구는 자싱에서 함께 선상생활을 이어가던 주아이바오를 난징으로 데려와 회청교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은 밀정과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고물을 줍고 다녔다.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고물쟁이로 신분을 위장한 것인데, 태준이는 그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상하이와 자싱을 거치며 김구의 행적을 깊이 체득한 터라 그 의미가 더 남달랐다고 한다.

이날 기자는 학생들을 위해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했다. 하얀 국화 한송이, 학생들이 회청교 아래 흐르는 강을 향해 김구를 생각하며 꽃 한송이씩 던져주길 바랐다. 아무런 표지석 하나 없는 공간이지만 김구는 이곳에서 버티고 버티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 동안 태준이를 비롯해 거제와 서울에서 모인 30여 명의 청소년, 10여 명의 선생님과 함께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중국에서 진행했다. ⓒ 김종훈

 
"17살 박영심을 만난다는 것"

임정로드 탐방단의 마지막 목적지는 리지샹 위안소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난징대학살 후 위안소를 본격적으로 시행한다. 일본군이 들어선 곳이면 으레 위안소도 같이 생겼는데 난징에서만 40개가 넘는 위안소가 세워졌다. 그중 가장 악명을 떨친 곳이 바로 리지샹 위안소다. 아시아 최대규모의 위안소였다. 이곳 두 번째 건물 19번 방에서 평안도 출신 박영심이 17살에 끌려와 3년 동안 능욕을 당했다.

박영심의 이야기는 절절하다. 사실 박영심이 없었다면 난징 리지샹 위안소도 존재할 수 없었다. 리지상 위안소의 풍문만 돌았지 실제 상황을 증언해 줄 인물이 전무했다. 건물이 헐리고 재개발이 진행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돈 2003년 11월 박영심은 현장을 찾아 증언했다.

"내가 있던 곳이 바로 여기다."

박영심의 증언이 난징의 재개발을 막았다.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 박영심의 증언과 여러 기록을 종합해 난징 한가운데에 유적 진열관을 마련했다. 정확히 12년이 걸렸다. 그 사이 박영심은 세상을 등졌다. 2011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증언이 기초가 돼 아시아 최대규모의 위안소유적진열관이 만들어진 사실은 변함이 없다. 총 3,000㎡ 넘는 건물에는 1600여 점의 전시물과 680장의 사진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다. 일본군이 난징에서 동양 최대 규모로 위안소를 운영했던 8개 건물 가운데 6동을 온전한 형태로 복원한 것인데, 1933년 5월 김구가 장제스를 만나 공식적인 회담을 한 총통부와도 걸어서 5분 거리에 불과할 정도로 시내 중심이다. 우리로 치면 광화문 사거리 한복판에 리지샹 위안소가 복원된 것이다.
  

박영심 할머니와 위안부 소녀들 우측에 임신한 여성이 고 박영심 할머니다. 박 할머니 옆으로 불안한 얼굴의 위안부 모습과 가장 왼쪽에 밝게 웃는 군인이 매우 대조적이다. ⓒ 김종훈

  

박영심 할머니의 19번 방 고 박영심 할머니는 이곳 19번 방에서 3년간 생활했다. 중국 정부는 박 할머니의 증언대로 이곳을 복원했다. ⓒ 김종훈

 
사실 리지샹 위안소 전체를 관람하기는 쉽지 않다. 내부 촬영을 금지할 정도로 충격적이고 섬뜩한 내용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4세 미만은 출입이 제한된다. 이 때문에 탐방단 중 일부는 입장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몇 장의 사진만 훑어보아도 일본이 난징을 점령해 얼마나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박영심은 이곳에 와서 "3년 동안 머물며 하루에 많게는 서른 명의 일본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일본 병사가 군도를 휘둘렀고 다락방 고문실에서 전라로 체벌을 당했다"라고 덧붙였다.

충격과 공포, 분노 속에 박영심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흔적을 쫓다 보면 어느새 살아남은 위안부 소녀들,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버린 소녀들의 증언이 이어진다.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홍콩,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도 위안부 소녀들이 끌려왔다.

임정로드 탐방단에는 중학생 소녀들도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다들 박영심의 동상 앞에서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로 광장에 나왔다. 나오자마자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을 향해 묵념을 올렸다.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다들 박영심 이름 석자를 가슴 속 깊이 새기고 돌아갈 것이다. 야구소년 태준이가 기자에게 '일본에는 절대 지지 않겠다'라는 의지를 밝힌 곳도 이곳 리지샹 위안소다.
  

지난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 동안 태준이를 비롯해 거제와 서울에서 모인 30여 명의 청소년, 10여 명의 선생님과 함께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중국에서 진행했다. ⓒ 임정로드 탐방단

 
개인적으로 학생들과 이번 여정을 다니며 느낀 한 가지가 있다. 우리 청소년들의 수학여행을 '임정로드'로 대체하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다. 천둥벌거숭이같던 야구부 소년들도 여정을 마치고 자연스레 우리의 뿌리와 독립운동사를 줄줄 꿰는 모습을 보았다.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인데, 수학여행, 말 그대로 배움을 익히는 여행이다. 임정로드 탐방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3박 4일간의 여정은 단순한 탐방을 떠나 아이들의 수학여행을 실현하는 첫 걸음이었을지 모른다. 여정은 끝났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