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4 14:08최종 업데이트 19.10.2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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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은 1911년 창설된 '서화미술회'의 설립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 서화미술회는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수하에서 활동하던 평양 출신의 서화가 옥경(玉磬) 윤영기(尹永基, 1833-1927)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미술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겨우 1년 만에 매국노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농간에 운영권을 빼앗기고,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이 맡아 운영을 하게 된다.

서화미술회는 '서과(書科)'와 '화과(畵科)'로 나누어 미술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서화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기간은 3년이었으며 서과의 선생은 강진희(姜璡熙), 정대유(丁大有), 화과는 김응원(金應元), 강필주(姜弼周), 이도영(李道榮) 등이었다. 제1기 학생은 이한복(李漢福), 오일영(吳一英), 이용우(李用雨), 제2기생은 김은호(金殷鎬), 제3기생은 박승무(朴勝武), 제4기생은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최우석(崔禹錫) 등 재능 있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이들 선생과 학생 중에는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선생이면서도 다른 선생의 제자뻘이었고, 학생들과도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 마치 선배 같은 인물이었는데, 바로 그가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이었다. 이도영은 서화미술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이미 안중식에게 드나들며 배우던 선배 같은 이였다. 그러니 선배 같은 스승이었다. 요즘 대학으로 따지자면 젊은 교수나 조교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도영의 출신과 미술 공부에 대한 노력
 

그림 그리는 이도영. 동아일보 1928. 10. 25. ⓒ 황정수

 
이도영은 북촌 가회동 지역에서 태어나 창덕궁 남쪽 원남동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도영은 당시 화가 지망생으로서는 비교적 집안이 좋은 편이었다. 조선시대의 화가들은 대부분 중인이거나 신분이 미미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도영이 태어난 연안 이씨 집안은 이종우(李鍾愚), 이공우(李公愚), 이교익(李敎翼) 등 선비 서화가를 배출한 명망 있는 집안이었다.

이도영은 1901년부터 안중식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그는 타고난 재주로 일취월장하는 실력 향상을 보였다. 스승 안중식이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솜씨를 내려 받았듯이 이도영 또한 안중식의 솜씨를 그대로 빼박았다. 때로는 안중식의 그림 중에 장승업 못지않은 것이 있듯이, 이도영의 그림 중에도 안중식의 그림에 버금가는 것도 많았다.

장승업, 안중식, 이도영 3대를 관통하는 화법상의 가장 큰 공통적 특징은 빼어난 기교이다. 이들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다른 작가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장승업이 공부를 하지 못해 글씨에 미숙했던 것만 예외였을 뿐, 나머지 미술 기교는 의발을 전수받은 듯 모든 것이 닮았다. 그만큼 재주에 승한 화가들이었다. 특히 안중식과 이도영은 글씨까지도 매우 닮았다.

이도영이 추구한 전통 서화의 세계
 

이도영 ‘노안도’ ⓒ 황정수

 
전통 회화 방면에서 이도영은 장승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스승 안중식의 화풍을 계승했다. 그러나 장승업과 안중식이 산수화를 기본으로 한 것과 달리, 이도영은 산수화에는 많은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화조화 · 고사인물화 · 기명절지도 등의 분야를 잘 하였다. 평소 그의 성격이 소심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여린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호방한 산수화보다는 다분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화조화가 더 잘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도영의 화조화 필치는 매우 단정하면서도 섬세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중국 화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공부한 스승의 영향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꽃은 주로 사군자나 동양의 꽃들에 채색을 넣어 그린 것이 많았다. 새는 주로 기러기와 오리 등을 잘 그렸으며, 한국의 전통적인 작은 새들도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 중에서 당시에 가장 인기 있던 화목은 '노안도(蘆雁圖)'나 대나무, 국화 그림 등이었다.
                       

이도영 ‘기명절지도’ ⓒ 국립현대미술관

 
그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된 화목은 단연 '인물화'와 '기명절지화'이다. 인물화는 주로 고사인물화나 도석인물화 등의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었는데, 단순화된 인물 표현과 빠른 필치, 간결한 화면 구성을 특징으로 하여 빼어난 솜씨를 보였다. 특히 얼굴의 표정이나 옷가지 각 부분의 자연스러운 표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기명절지도 또한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수준과 개성을 보인다. 기명절지도는 중국에서 발전하여 19세기 후반 장승업에 의해 조선에서 유행한 것이다. 이후 안중식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한국 회화의 중요한 소재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이들의 계보를 이은 이도영의 기명절지는 이전 것과는 다른 모습이 있었다.

본래 기명절지도 속에 나오는 그릇들은 보통 중국의 기명들인데, 이도영의 작품에서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등 우리나라의 청동기나 기명을 그리려는 노력을 한 것이 꽤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한국 미술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솜씨에도 한국미술사에서 늘 장승업, 안중식의 아류로서 평가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너무 단순하게 바라본 결과였다.

이도영이 스승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식은 이도영의 미술세계를 너무 좁은 관점에서 본 오류이다. 실제 이도영은 스승의 품안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근대 인식을 갖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였으며, 그의 노력은 열강들에 의해 새로이 들어온 언론이나 교육 등을 만나며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된다.

그는 새로 발간되는 신문에 만화를 그리고, 잡지에 삽화를 그리는 등 새로운 미술 양식을 현실화하는 많은 노력을 하였다. 또한 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에도 많은 삽화를 그렸고, 대중적 인기가 있었던 딱지본 소설이나 잡지의 표지를 그리기도 하였다.

한국 만화계의 선구자로서의 이도영
                   

이도영 대한민보1909. 6. 2 ⓒ 국립중앙박물관

 
이도영이 활동한 여러 분야 중에서 만화 부분, 특히 시사만평 분야에 기여한 것은 한국 만화 발전의 시금석이 되었다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 일어난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하면서 풍자성이 강한 시사만화를 신문에 게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효시라 할 만한 중요한 일이었다.

1909년 6월 2일 오세창은 일본에서 돌아와 '대한민보'를 창간한다. 그는 일본에서 본 신문의 양식을 참고하여 신문에 만평을 넣을 생각을 한다. 그래서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도움을 청하니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이도영을 추천한다. 이도영 또한 새로운 문화에 욕심을 내어 일본 만화 등을 참고하며 만화 그릴 준비를 한다.

이도영은 '대한민보' 창간호에 연미복을 입고 서양 모자에 지팡이를 든 개화신사가 "대국의 간형(大局의 肝衡), 한혼의 단취(韓魂의 團聚), 민성의 기관(民聲의 機關), 보도의 이채(報道의 異彩)"라고 말하는 모습을 그려 신문의 새로운 모습이 도래했음을 알린다. 한국 최초의 만평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도영의 시사만평은 무분별한 신문화의 유입에 따른 경계의 내용, 교육 실태에 대한 풍자, 일본의 강압적 행태에 대한 풍자가 주를 이루었다. 또한 친일인사를 비롯하여 외국 자본가나 국내의 지주 계층에 대한 비판, 관료계층의 반민족성, 사회의 퇴폐적 행태를 꼬집는 등 근대기 우리나라의 사회 · 문화 · 정치실태와 인물 등 다방면에 대한 풍자와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표지화, 삽화 분야를 개척하다
                  

이도영 '행락도' 표지화 ⓒ 국립중앙박물관

 
이도영은 근대기에 등장한 신문과 잡지, 소설 등의 표지화와 삽화도 자주 그려 이 분야에서도 선구자 중의 한 명으로 평가 받는다. 신소설 작가 이해조(李海朝)의 '구마검(驅魔劒)'과 유일서관에서 출간한 '홍도화(紅桃花)'의 표지도 그가 했으며, 동양서원에서 나온 '행락도(行樂圖)', '십오소호걸(十五小豪傑)' 등의 표지도 모두 그의 솜씨였다.

또한 1907년에 발족된 '대한협회' 교육부에서 미술교과서 제작 출판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할 때 참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도화임본(圖畵臨本)', '연필화임본(鉛筆畵臨本)' 등 도화 교과서의 원화(原畵)를 맡아 그렸다.

이도영은 당시 상당수의 화가들이 애호가들의 취향에 맞는 감상용 회화를 그릴 때, 새로운 미술 형태인 시사만평을 비롯하여 교과서 원화, 잡지의 표지화나 삽화 등에 눈을 돌린 선구자였다. 이러한 이도영의 활동은 인쇄매체의 대중적 역할을 일찍이 깨달은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또한 이러한 매체들을 통하여 대중들의 각성과 애국계몽을 실현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도영은 근대 미술사적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만한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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