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2 09:17최종 업데이트 19.10.22 09:36
  • 본문듣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진강(전장) 사무처 구지 ⓒ 조종안

 
'노구교사건(1937년 7월 7일)'을 핑계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그해 12월 13일 중국 수도인 남경(난징)을 함락시킨다. 전운을 감지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국민당 정부 주선으로 11월 하순 난징을 빠져나온다. 진강(전장)에 있던 임시정부 청사도 후난성 창사(長沙) 서원북리 6호로 옮기고 이듬해 7월 중순까지 그곳에 머무른다.

장제스 정부가 서둘러 남경을 포기하고 중경(충칭)으로 수도를 옮기자 임정 요인들과 그 가족 100여 명도 목선을 타고 장강(양쯔강) 줄기를 따라 이동한다. 대식구인 데다 곳곳에 쳐놓은 일제의 감시망 때문에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수로와 육로를 교대로 이용하면서 50여일 만에 도착, 어렵게 거처를 마련한다. 그러나 창사도 안전한 곳은 못 되었다.


일본군은 1938년 초여름 후난성 경계까지 진출한다. 창사와는 지척으로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7월 19일 다시 짐을 꾸려 피난길에 오른다. 창사-광주(광저우) 거리는 약 700km. 전쟁의 포화 속에 기차를 이용한 이동은 목숨을 내건 대장정이었다. 적기의 공습 때마다 기차는 멈췄고, 사람들은 주변 숲으로 숨었다. 기차는 그렇게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출발한 지 3일 만에 광저우에 도착한다.

김구가 밀정에게 피격 당했던 남목청 9호
 

가슴에 총탄을 맞고 병원에 입원한 김구 ⓒ 부산시립박물관

 
창사는 후난성 성도로 다양한 독립단체와 항일투사의 활동 무대였다. 특히 남목청(楠木廳) 9호의 조선혁명당 본부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이 거주했던 건물이자 항일투쟁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3당 통합회의'가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 진영은 중일전쟁을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의 또 다른 기회로 봤다. 이를 위해서는 난립한 세력들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1938년 5월 7일 김구는 남목청 9호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합당을 위한 '3당 통합회의'를 열었다.

이날 김구는 회의 도중 권총을 들고 난입한 이운한에게 저격당한다. 이운한은 김구,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등에게 총격을 가하였고, 현익철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가슴에 총상을 입은 김구는 상아병원으로 후송, 구사일생한다.

당시 장제스는 친서와 치료비를 보내는 등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남목청 사건은 임시정부 내의 세력 갈등, 특히 좌파 소행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8년 발굴된 조선총독부 '대(對) 김구 특공공작 보고서'에서 일제의 치밀한 공작으로 드러났다. 이운한은 일제가 사주한 밀정이었던 것.

임시정부 청사로 두 달 동안 사용됐던 동산백원
 

동산백원 건물 근처에서 김종훈 기자 설명 듣는 탐방단 ⓒ 조종안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다섯째 날(5일)은 광둥성 성도인 광저우(廣州)에서 시작했다. 광저우는 지역의 행정·경제·문화 중심도시이자 화남지방 최대 무역도시로 알려진다.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돌아본 임시정부 유적지는 동산백원, 동교장, 광주기의열사능원, 월수공원, 황포군관학교 등.

간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가랑비가 소나기로 변했다가 어느 순간 그치고, 해가 뜨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고... 날씨가 팥죽 끓듯 변덕이 심했다. 하지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1월 탐방 때는 5박 6일 중 마지막 날에만 겨우 해를 봤는데 이번엔 닷새 만에 시원한 비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오전 8시 30분,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첫 목적지는 휼고원로 12호에 자리한 동산백원(東山栢園). 이 건물은 국공합작을 결의했던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와 이웃하고 있어 두 나라 근대사의 한 단면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그동안은 중일전쟁 때 일제의 폭격으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2년 전 광저우 총영사관 노력으로 현 위치가 확인됐으며, 임시정부 광저우 청사가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했던 동산백원 건물 ⓒ 조종안

 
일행은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 앞에서 김종훈 기자 설명을 듣고 지척에 있는 동산백원으로 이동했다.

"이 건물이 동산백원입니다. <백범일지>에는 이렇게 써있어요. '나는(김구는) 후난성 장치중(張治中) 주석을 방문해서 광동으로 이사하는 것을 상의했다. 그 결과 장 주석이 기차 한 칸을 독채로 우리 일행에게 내줘 무료로 쓰게 했고, 광동성 주석 오철성(吳鐵城)에게 친필 소개장을 주니까 큰 문제가 해결됐다. 그리고 이준식 채원개 두 사람 주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 청사로 정하고 아세아 여관에 대가족을 수용했다.'라는 내용이 백범 선생 기록에 있는 겁니다."
 

김 기자는 "동산백원은 임시정부가 두 달밖에(1938년 7월~9월) 사용하지 않은 곳이지만, 역사적으로 아주 귀한 장소"라며 <임정로드 400km> 책에 실린 옛 동산백원과 작년 취재 때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이어 "작년에는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돌아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어려울 것 같다"라며 아쉬워했다.

애국지사들의 땀과 눈물이 서린 동산백원, 그러나 빨랫줄에 내걸린 옷가지와 널브러진 집기들, 그리고 물기 머금은 낙엽 더미만 보일 뿐 임시정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적 건물이라고 소개하는 안내판에도 '韓國'이나 '코리아'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 '입구 담벼락에 임정 청사였다는 표지판이라도 하나 붙여놨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건국절 논란'은 이제 그만... 동교장이 갖는 의미
 

광저우인민체육장 입구(동교장 터) ⓒ 조종안

 
두 번째 찾아간 유적지는 '교장서로 18호'에 자리한 동교장(東較場). 풀이하면 '동쪽의 마당'이란 뜻으로, 당시에는 '외국인 접견 장소'였단다. 그렇게 귀한 공간이 지금은 인민체육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김종훈 기자는 "1979년 중국 정부가 국제경기가 가능한 축구장으로 개조하는 바람에 옛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강조한다.

"왜 동교장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냐. 우리나라 건국절 논란이 10년 전부터 있었잖아요.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이 탄생한 날이라고. 그런 논란을 한 번에 격파시킬 수 있었던 자리가 바로 동교장입니다. 1921년 10월 국무총리였던 신규식 선생이 이곳 광저우까지 와서 누구를 만나냐, 당시 호법정부 수장인 쑨원을 만나 회담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최초로 승인됩니다. 나라 대 나라, 정식 외교사절로 만나 인정받은 거죠. 그것도 1921년에. 그런데 어떻게 나라가 없었다는 얘긴지. 말이 안 되죠. 문서도 다 남아 있는데..."
 

김 기자는 "신규식 선생은 10월 3일 이곳에서 쑨원과 회담하고 보름쯤 지난 18일 조선독립에 대한 요청안이 골자인 국서를 전달했다. 이러한 과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외교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일부 사람들은 건국절 논란을 반복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임시헌장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규정했다. 이는 제헌헌법(1948) 이래 지금까지 헌법 제1조가 되어 왔다. ⓒ 국사편찬위원회

 
김종훈 기자 설명을 정리하면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국호(대한민국)와 헌법, 그리고 민주공화제가 1919년 4월에 만들어졌고, 2년 후인 1921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와 중국 호법 정부 수장이 동교장에서 공식 접견 의식을 치른 뒤 국서를 주고받았다. 국서는 11월에 통과되어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 임시정부를 인정하게 된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무대 활동을 성공적으로 시도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근거가 존재함에도 자유한국당과 일부 우익 세력은 건국절 논란을 계속 부추기고 있다. 다행인 점은 2017년 광복절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명확히 규정했다. 그해 12월에는 대한민국 현역 대통령 중 최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방을 맞이한 충칭 연화지 청사를 찾아 애국지사들의 뜻을 기렸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이하는 2019년, 우리 자신의 출발점을 돌아보는 '임정로드 탐방'이 더욱 중요한 이유다. (계속)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