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04 12:43최종 업데이트 19.10.04 12:43
백민주는 침착하게 자세를 잡았다. 17이닝까지는 16 대 12로 앞서 나갔다. 그런데 20이닝 들어 백민주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17 대 15로 좁혀졌다. 이번 공을 꼭 맞춰서 점수를 벌려야 한다. 그러면 20점까지는 단 두 점이면 된다.

빨간 공을 향해 노란 공 윗부분으로 부드럽게 큐를 밀어 넣었다. 두께만으로 '제각돌리기'를 했지만 "깻잎 한 장 차이"만큼 짧아 득점하지 못했다.


'제각돌리기'는 백민주가 스승 김진삼 밑에서 제일 많이 연습한 기술이다. 당구에 입문하고 3개월 될 즈음 꾀가 나기 시작했다. 연습하기는 싫은데 선생님 눈치가 보여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별로 움직이지 않고 당구대 반 쪽 귀퉁이에서 익힐 수 있는 '제각돌리기'만 갈고 닦았다. 싫어서 꾀를 부렸는데 묘하게도 그가 내세울 수 있는 장기가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승부처에서 그 기술이 먹혀들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가는 백민주의 볼이 발그스름해지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승부치기 접전 끝에

전세는 22이닝 들어 역전되었다. 하야시 나미꼬가 일본 대표선수답게 뒷심을 발휘, 3연속 득점에 성공하면서 19:18이 된 것이다.

그러자 김포시연맹 회장배 결승경기가 열리던 '각구목' 분위기는 술렁거렸다. 일요일 낮 경기이고 일반 당구장에서 열린 대회라 관객이라곤 대회관계자 몇몇뿐이었지만 승부추가 하야시 쪽으로 기우는 듯하자 수근거림이 계속되었다.

25이닝 선공(先攻)에서 하야시가 비껴치기 공격에 성공하면서 20점에 먼저 도달했다. 이제 25이닝 후구(後球)인 백민주의 공격 차례. 여기서 득점하면 승부치기를 하게 되고, 실패하면 준우승에 머문다.

백민주는 숨을 길게 한번 들이쉬고 입술을 지긋이 물었다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큐를 쭈욱 뻗었다. 
 

백민주의 샷 모습 그의 경기에서 송골매의 눈빛으로 당구공을 응시한다. ⓒ 경기도 당구연맹 함상준 사무국장

 
백민주는 2013년 의정부공고 3학년 시절 큐를 잡았다. 당구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당구장 대표이며 선수 육성 경험이 있던 김진삼을 만나 공을 치게 되었다. 당구로 대학갈 수 있다는 말이 달콤하게 들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본자세와 스트로크를 많이 훈련했다. 그때 "큐를 자신 있게 뻗어라"라는 말을 수천 번이나 들었다.

자신감 있게 쭈욱 뻗은 덕분인가? 25이닝에서 백민주도 득점에 성공해 20점을 달성했다. 경기는 이제 '승부치기'에 들어가야 한다. 축구로 치면 정규시간 내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차기'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백민주는 차례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당구에 복귀하고 4개월 만에 오른 결승 무대이니 내심 "준우승도 어디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렵게 오른 결승인데 기왕이면 우승까지 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심장은 더욱 콩당거리고 볼은 더욱 발그스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승부치기 첫 공격에 나선 하야시가 실수를 해서 득점에 실패했다. 순간 백민주는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뚜벅뚜벅 걸어나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곤 큐를 부드럽게 밀어쳤다. 멀리 장 쿠션과 단 쿠션을 돌아 나온 수구는 마지막 목적구 흰 공을 맞췄다. 승부치기 첫 이닝에 백민주가 결승점을 뽑은 것이다. 이 점수로 우승이, 난생 처음 우승이 확정되었다.

포커페이스가 되라

백민주는 당구 입문 후 6개월 남짓 공을 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길 같았다. 결국 대학 진학도 포기했다. 그리고 잡은 직장이 서울 유명 백화점 보안요원. 나름 재미있었고 적성에도 맞았다. 고객과 벌어지는 분쟁에 언제나 앞장 섰고 일도 잘 처리했다. 그래서 사내 표창장은 물론 경찰서장상도 받았다.

하지만 보안요원이 70여 명 정도 되는데 모두 똑같은 직급이었다. 3년을 일했지만 승진은 없었다. 백화점에서 직접 고용한 것도 아니어서 연봉도 시원치 않았다. 12시간 2교대 근무라 힘들기도 하거니와 시간도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래서 2018년 12월 31일부로 사표를 썼다.

그리고 김진삼의 권유대로 2019년 1월 1일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큐를 잡았다. 그 사이에도 간간히 대회에 출전은 했었지만, 정말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하루 8시간 이상을 연습했다. 덕분에 2019년 4월 21일 열린 대회에서 3개월 남짓 연습으로 우승까지 했으니, 비록 전국 규모 대회는 아니었다고 해도 백민주에게 의미가 컸다.

사실 선수 경력이 짧은 백민주가 가장 부족한 점은 "압박감을 이겨내는 능력"이었다. 승부가 마지막까지 끈적끈적해질 때 볼은 발그스름해지고 표정에 그늘이 져, 이른 바 '포커페이스'가 안 됐다. 그래서 스승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에선 '멘탈'을 키우라고 성화였다.

그런데 이번 경기는 역전, 재역전에 승부치기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였고 그것을 이겨내고 우승을 먹었다. 그로서는 승부근성과 심장근육까지 키운 셈이었다. 
 

백민주의 우승기념사진 2019년 4월, 김포시당구연맹회장배에서 우승하고 출전 선수들과 함께 ⓒ 경기도 당구연맹 사무국장 함상준

 
백민주는 우승이 확정되자 환하게 웃었다. 연맹 관계자들이 악수를 청했다. 빌리아드TV 중계카메라가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백민주는 큐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흔들었다. 해설위원의 한마디가 들렸다. "백민주 선수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매일 당구장으로 출근합니다

우승 일주일 후, 그는 '김치빌리아드 마곡점'에 휴가를 마치고 출근했다. 마곡 신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당구장이 그의 직장이다. 그는 여기서 '플레이어'로 일한다. 당구장에 오는 아마추어 고수들을 상대로 경기를 한다. 적으나마 고정월급을 받으면서 훈련 겸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승하고 술자리, 밥자리가 많았다. "축하해, 민주야" "지금부터야"라는 격려, "참피온을 향하여"라는 건배사가 오고갔다. 덕분에 우승 상금으로 받은 삼백만 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 엄마에게 용돈도 드리고, 밀린 공과금도 해결했으니 마음은 잠시나마 편했다.

그가 출근하는 오후 1시경이면 당구장은 조용하다. 점심 시간을 이용한 손님들도 모두 빠져나가 실장과 백민주 둘뿐이다. 개인연습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백민주가 즐겨 연습하는 7번 테이블 위로 창가를 넘어온 햇빛이 가득 모여 들었다. 백민주는 파란 색 당구대 위에 노란 공, 빨간 공, 하얀 공을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그는 당구대 앞에서 나무 기둥처럼 튼튼히 다리를 세우고 '브리지'는 쇠고리보다 단단하게 해 큐를 움켜쥐고 자세를 취했다. 눈은 하얀 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어깨의 힘을 빼고 팔꿈치 힘에 손목 힘만 조금 보태 부드럽게 밀었다. 하얀 공은 미끄러지며 굴러가다 빨간 공 옆구리를 때리고 쿠션을 세 번 돌아 노란 공에 부딪혔다.

세 개의 공이 새로운 위치에 서자 백민주는 일어서서 공격 방향을 궁리하고 회전의 양, 스트록의 세기, 찔러야 할 위치를 꼼꼼히 따져보았다. 그리고 엎드려 다시 자세를 취하고 이번엔 힘 있게 타격을 가했다.
 

연습 중 잠시 포즈를 취한 백민주 프로 그는 김치빌리아드 마곡점에서 플레이어로서 활동하고 있다. ⓒ 민병래

   
스승은 그에게 "묵직하게 공을 굴려라" "공이 안정감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아직 백민주는 '구질'(球質)이란 개념이 알쏭달쏭하다. 그 뜻을 몸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계속 큐를 뻗는다.

큐를 내밀 때마다 조용한 당구장에 땅! 땅!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와 어울려 빨강 공과 노랑 공은 분리되었다가 모이고 굴러가다 멈추고 빠르게 전진하다 서서히 미끄러진다.

이러기를 몇 시간, 한낮의 햇빛은 조금씩 누그러들지만 백민주의 큐 끝은 더욱 예리해지고 눈빛은 송골매처럼 더욱 날카로워진다. 백민주의 콧등에 흐르는 땀방울이 테이블에 '톡'하고 떨어질 때면 그제야 큐를 거두고 잠시 다리쉼을 한다. 하루 큐 질 천 번 이상, 8시간 이상 수련을 하자고 늘 스스로 채찍질하고 있다. 그는 다가오는 11월 제5차 여자프로대회에서 '참피온'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백민주가 퇴근하는 시간은 밤 10시 전후, 오늘은 손님들과 세 게임을 치렀다. 그가 이기면 손님이 게임 값을 지불하지만 그가 지면 손님은 그냥 가면 된다. 재미있는 한국식 당구 문화다. 백민주가 프로라고 하지만, 그를 능가하는 남자 동호인들이 워낙 많다. 그래서 슬렁슬렁 칠 수가 없다. 당구장 매출도 올려줘야 한다. 권투로 치면 스파링인 셈이며 실전 같은 훈련도 되기에 매 게임 최선을 다한다.

당구는 거짓이 없다

백민주는 "내일 뵐게요"라고 인사하고 당구장을 빠져 나왔다. 밤거리에는 인근 발산역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바쁘다. 마곡은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오피스타운으로 변모했다. 말쑥하고 맵시 있는 직장인들 사이로 운동복을 편하게 입고 그저 손가방 하나 든 백민주는 발걸음을 섞었다.

요즘 청년 세대의 계층을 구분하는 간명한 기준이 화제다. 대기업에 다니는가? 정규직인가? 노조가 있는가? 이를 모두 충족하면 말할 것도 없이 상위 그룹이다. 중소기업이어도 정규직이면서 노조가 있으면 역시 상위 그룹이다. 여기까지를 보통 '20% 그룹'이라고 세상은 분류한다. 백민주가 출퇴근하면서 발걸음을 섞는 마곡 오피스타운의 많은 이들이 여기에 속하거나 근접할 것이다.

백민주는 대학은 커녕 공업고등학교를 나왔을 뿐이다. LPGA 여자 골퍼들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는 것도 아니고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아직은 '동네 스포츠'로 취급받는 당구일 뿐이다. 게다가 이제 막 프로로 입문한 여자 선수다. 
 

인터뷰하면 웃는 백민주 그는 보이시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 민병래

 
그렇지만, 백민주는 아마 내일도 모레도 천 번의 큐질을 할 것이다. 8시간 수련을 하면서 매일 땀 흘릴 것이다. 햇빛 가득한 당구대 위에서 노란 공, 하얀 공, 빨간 공이 펼치는 아름다운 춤사위에 몸을 맡기면서...

스승 김진삼은 백민주에게 강조했다. "당구는 거짓이 없다"고.
백민주는 이를 해석해서 이렇게 말한다. "당구는 끝없는 계단"이라고...

<못다 한 이야기>

1. 백민주는 올해 프로에 입문했습니다. 프로당구협회가 출범하면서 합류했고 아마대회는 2019년 4월 21일 김포시연맹회장배 오픈대회에 참가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2. 백민주는 우승 이후 9월 12~16일에 열린 '2019~2020시즌 프로당구 4차 대회인 TS참피온십'에 출전했습니다. 서울 강서구 메이필드 호텔 특설경기장에서 열린 경기는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남자부는 우승상금이 1억원이었고 여자부도 우승 상금이 삼천만 원일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당구라는 스포츠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프로대회였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는 8강에 올랐지만 일본의 강호 고바야시에 막혀 4강 진출에는 실패했습니다. 3전 2선승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2-0 (11-4, 11-9)으로 지고 말았죠. 64강 3조 경기에서 1위, 32강에서도 조 1위를 차지하고 기세는 16강까지 이어졌습니다.

16강 대진표는 그에게는 최악이었습니다. 포켓볼 세계 챔피언이었던 김가영, 지난 대회 준우승을 했던 서한솔, 실력파 강지은(그는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합니다) 등이 같은 조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후반 40분씩 경기를 펼쳐 2명이 8강에 진출하는 규칙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닝당 1점대를 기록하면서 1위로 통과했습니다. 아깝게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그가 당구인생에서 거둔 최고 성적입니다.

3. 브리지는 당구에서 목표로 하는 수구의 당점을 정확히 맞추기 위하여 큐의 끝을 고정하는 손가락의 모양. 검지손가락을 고리 모양으로 만든 후 엄지손가락 끝에 붙입니다. (출처: 우리말샘 사전)

 <백민주의 B컷> 
 

주부교실 강의 중 그는 강서구청 당구주부교실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 민병래

   

백민주의 연습 장면 그는 하루 8시간 연습을 하고자 노력한다. ⓒ 민병래

   

백민주의 연습 장면 그는 연습을 실전 같이 한다. ⓒ 민병래

    <백민주의 프로필>

1996년 2월7일생
2014년 의정부공업고등학교졸업
2014년 의정부당구연맹등록
2017년 제17회경기도 당구연맹회장배 한국여자3쿠션 챔피언쉽 5위
2018년 제2회 한밭큐 경기도여자3쿠션 오픈3위
2019년 제4회 김포당구연맹회장배 한밭큐 경기도여자3쿠션오픈 우승
2019년 '2019~2020시즌 프로당구 4차 대회인 TS참피온십' 5위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