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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26 15:40 수정 2019.09.26 15:40

임군홍이 해방 후 살던 명륜동 집터. ⓒ 황정수

 
혜화동을 지나 명륜동에 이르러 154번지를 찾아 가면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집이 있다. 지금은 붉은 벽돌로 새로이 지은 집이 서 있지만 예전엔 제법 큰 한옥이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옛 집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감나무만 늙어 이 집이 오래 전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집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집터는 근대기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화가 중의 한 명인 서양화가 임군홍(林群鴻, 1912-1979)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이다. 임군홍은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졌으나 6.25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한동안 전시 및 연구 등이 금지되었던 불운한 화가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그의 일생은 불행한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 같다.

우연한 기회에 임군홍의 아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책에서만 보던 임군홍이 되살아온 듯 두 부자의 모습이 겹쳐졌다. 조선시대 초상화를 연구하다 그 후손들을 만나보면 순간적으로 선뜻 놀라는 경우가 있다. 그 후손들의 모습이 초상화 속 선조의 모습을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월북한 서양화가 임군홍
               

베이징에서의 임군홍(오른쪽) ⓒ 임덕진

 
임군홍은 일제강점기 한국 화단을 대표할 만한 작가 중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공부한 화가로 유명하다. 이런 면에서 박수근(朴壽根, 1914-1965)과 매우 유사하다. 그는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1927년 주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그만둔다.

상급학교 진학을 못한 임군홍은 신문 배달과 개인병원 등에서 일하며, 밤에 양화연구소에 나가 그림을 배운다. 처음에는 매우 힘들었으나 점차 일자리의 형편이 좋아지자, 일본에서 발행된 미술 자료 등으로 공부하며 뛰어난 성과를 보인다. 비록 미술학교를 다니지는 못했지만 다른 미술학도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군홍이 처음 화단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의 스케치'란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에 들면서부터이다. 이후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여인 좌상', '모델' 등 작품을 출품하여 6년 연속 입선을 한다. 이후 화가로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친구인 화가 엄도만(嚴道晩, 1915-1971)과 함께 '예림도안사'라는 업체를 차리기도 하였으나 운영이 여의치 않아 곧 그만 둔다.

임군홍의 중국에서의 생활
 

임군홍 ‘봄날의 자금성’ ⓒ 임덕진

 
임군홍은 1939년 27세에 중국을 여행하던 중 중국 풍광에 매료되어 한구(漢口 : 지금의 武漢)라는 지역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한구미술광고사'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광고 사업을 시작한다. 다행히 사업은 잘 되어 생활이 안정되었고, 가족을 불러 들여 여유로운 삶을 보내게 된다. 이런 생활은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는 사업의 성공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한구의 항구 풍경을 그리기도 하고,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을 찾아가 사생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베이징에서는 '자금성(紫禁城)'을 비롯한 이국적인 중국의 유적에 반하여 그 지역을 미친 듯이 그린다. 이렇게 그린 중국 풍경은 훗날 그의 미술 세계를 규정짓는 중요한 색채가 된다.
                         
중국에서 그린 작품은 대부분 유럽 인상파 화풍을 따랐다. 당시 인상파 화풍이 유행을 하기도 했지만, 베이징 지역의 고풍스러운 고궁 풍경과 유적을 그리는 데에 인상파 화풍이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물감을 넉넉히 칠하여 색감을 풍부하게 하는데 장점이 있었다. 또한 화려한 색감은 중국이라는 이국적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도 잘 어울렸다.

해방 후의 활동과 월북
                 

임군홍 ‘가족’ ⓒ 임덕진

 
임군홍은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와 명륜동에 정착한다. 중국에서의 사업 성공을 바탕으로 '우보당(牛步堂)'이라는 광고미술사도 차린다. 임군홍은 사업 수완도 좋아 수입이 꽤 좋았다고 한다. 미군정 하에서 '아카데미'라는 잡지의 홍보 간판을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 잡지가 미국 공보원에서 발행하는 것이라 실패할 염려가 없었다.

1946년에는 '양화 6인전'이란 전시회를 하였는데, 구성원은 신홍휴, 엄도만, 한홍택, 박병수, 이종무 등 모두 능력 있는 빼어난 화가들이었다. 그러나 순조롭던 그의 인생이 계속 좋은 일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무희 최승희(崔承喜, 1911-1967)가 사회주의자 안막(安漠, 1910-?)과 결혼하여 월북한 이후, 이들과 관련된 일로 뜻하지 않은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내용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광고회사를 하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철도청 운수부의 일까지 맡아 하게 된다. 마침 1947년 월력(月曆)을 제작하였는데 이 월력이 문제가 되었다. 월력의 내용이 남조선을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선동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1948년 갑자기 철도 경찰에 의해 검거된 것이다. 이유는 월력을 제작하며 도면에 북노당 간부인 최승희의 그림을 실었고, 색채를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색으로 하였으며, 운수부 마크를 적색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최승희가 쓰고 있는 모자의 갓끈에는 소련 16연방을 의미하는 16개의 염주와 조선을 의미하는 1개를 합쳐 도합 17개의 염주를 그렸다는 것도 주요한 혐의였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유였으나 당시 월북한 최승희 부부의 영향력을 생각한 남조선 정부의 편협한 시각에 걸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임군홍은 주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활동을 한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명륜동 집에서 그를 찾아온 사람들과 함께 월북한다. 본래 임군홍이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최승희 월력 제작 사건으로 투옥 생활 등을 겪으며, 임군홍의 사상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임군홍의 대표작 '모델'
 

임군홍 ‘모델’ ⓒ 임덕진

 
임군홍의 다양한 회화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이 1946년에 그린 '모델'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임군홍이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등 야수파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매우 세련된 구도나 자유로운 색감 구사 등 그의 작품 세계의 절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제 이 작품의 기본이 된 소묘 작품이 남아 있는데, 소재를 포착하는 솜씨가 매우 재빠르고, 대상을 묘사하는 순간적인 솜씨가 지극히 감각적이다.

이 원본 소묘에는 1940년이라는 일본식 연도와 서명이 적혀 있다. 이로 보아 중국 한구에서 소묘한 것을 해방 후 서울로 돌아온 이듬해에 캔버스에 유화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스케치한 시기와 본격적인 작품으로 제작한 시기가 5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은 조국의 해방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임군홍은 해방을 맞이하여 예전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크게 그려 완성시킨 후, 일본식 황기를 쓰지 않고 서기로 제작연도를 써 넣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해방을 대하는 화가로서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제작된 '모델'이라는 작품은 임군홍의 작품 중에서 화가로서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된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화가 임군홍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그동안 화가 임군홍에 대한 한국 화단의 시선은 그리 따뜻한 것은 아니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아 조직의 응원을 받지 못했고, 스스로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입신을 하였으나 최고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화가로서 전성기인 7년을 중국에서 보내 한국 화단과 멀어진 것은 작가로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또한 남북이 분단되는 과정 속에서 북쪽을 택함으로써 한동안 이데올로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철저하게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그런 탓에 한국 화단에서 금기시하는 화가로 대접 받았고, 화단의 중요한 작가로 평가 받지 못했다.

이제 사상적으로 해금도 되었고, 다행히 연구할 작품도 많이 남아 있다. 그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한국미술사에서 재평가하는 일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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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