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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20 15:15 수정 2019.09.22 13:50
쪽창으로 아침 해가 슬며시 들어올 때 오경운은 눈을 떴다. 몸이 찌뿌둥하다. 간밤에 땀을 많이 흘려 잠을 설친 탓이다. 9월 하순이지만 고시원을 하루 내내 감쌌던 열기는 밤새 머무르다가 새벽녘에나 겨우 물러났다. 선풍기 한 대 장만한다고 하면서도 미루고 또 미루다 겨우 여름을 넘겼건만...
 
지난 밤 꿈 속에서 오랜만에 아내가 보였다. 눈웃음 가득한 얼굴과 아담한 어깨선이 영락 없는 안사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지만 눈인사만 건네고 아내는 속절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30여 년 전 그날처럼...
 
오경운은 주섬주섬 아침 준비를 시작한다. 그가 사는 집, 아니 머무르는 방은 서울 을지로 5가 중부시장 한 귀퉁이에 있는 고시텔이다. 4층짜리 건물, 두 개 층에 한 평도 안 되는 방들이 다닥다닥 40여 개가 늘어서 있다.
 
오경운이 사는 방은 4층 맨 끝 방. 복도는 한 사람이 겨우 움직일 만한 폭인데 형광등 불빛마저 어둑해 축축한 분위기다. 오른쪽으로는 지린내를 풍기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고, 밥솥 단지가 늘어서 있는 공용 주방이 있다. 그 옆에 410호 문패를 달고 있는 방이 오경운의 보금자리(?)다. 

내 보금자리는 을지로 중부시장 고시텔
 

오경운이 머무는 고시텔그는 4층 끝방에 기거하고 있다. ⓒ 민병래


방을 들어서면 침대가 절반을 차지한다. 한 켠에는 조그만 옷장이 매달려 있다. 그 안에는 오경운이 아끼는 정장(최근 10여 년간 입어본 일은 없다) 서너 벌이 가지런하다. 방안을 가로지른 빨랫줄에는 속내의들이 줄지어 널려 있다. 발 하나 겨우 뻗을 수 있는 방바닥엔 커피포트에 '후라이팬', 양념간장, 조그만 도마까지 이런저런 세간들이 비집고 앉아 있다.
 
그는 방안에서 취사한다. 공용 주방은 동작 빠른 젊은 사람들 차지라 어쩔 수 없다. 코펠에 어제 남은 찬밥을 데우고, 김치찌개를 곁들이면 그게 전부다. 국물이 있어야 먹는 습관 때문에 김치 한두 보시기에 대파 썰어 넣고 고추장 휘휘 저어 끓인 찌개다. 끼니를 거르면 다리에 힘이 없어 이렇게라도 챙기려 한다.
    
아침을 때우고 그가 향하는 곳은 을지로 4가에 있는 '느린걸음'과 '유니콘'이란 회사다. 그곳에서 그는 '근조기 배달'과 '지하철퀵' 일을 하고 있다. 장례식장에 가서 '근조'라고 새겨져 있는 깃발을 설치하거나 소소한 물건들을 배달하는 게 그의 업무다.
 
오늘은 먼저 경기도 평택의 장례식장으로 가서 근조기를 설치해야 한다. 그가 사무실에 가기 전 들르는 곳이 지하철 화장실. 고시텔은 늘 샤워 전쟁, 볼일 전쟁이다. 4층에 기거하는 사람만도 스무 명 가까운데 그 많은 사람이 여름에 샤워 꼭지 하나에 매달려 살았다. 아침 용변은 더더욱 큰 일이다. 변기가 하나니 늘 밖에서 "언제 나와요? 전세 냈나?"하면서 목소리가 높아지기 일쑤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역을 택했다. 거기도 썩 편하지는 않지만.
 
오경운이 고시텔 생활을 한 지는 벌써 6년째. 얼마 전까지는 엘리베이터도 있는 건물에 방도 조금 넓직한 곳이었지만 한 달 세가 40만 원이 넘었다. 부담이 되어 25만 원을 받는 이곳으로 옮겼다.
 
옮겨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용변과 식사 준비는 말할 것도 없고 오래 전 사고로 내려앉은 엉치뼈에 82년 된 무릎을 이끌고 4층까지 오르면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주변에 그 흔한 편의점도 없어 쌀과 김치를 제때 들여놓지 못한 적도 있었다(요즘엔 인터넷으로 쌀과 김치를 주문하면서 고시텔 살아가기 요령을 터득하는 중이다). 그래도 하루하루 꿋꿋이 버텨온 나날들이다.
 
평택 행으로 시작한 오늘, 마지막 일과는 영동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다. 다들 꺼려하는 곳. 깃대와 거치대, 상자 무게를 합치면 제법 무거운 박스를 메고, 한티역에서 병원까지 걷기에는 먼 길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하루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마음이 뿌듯하다. 속으로 오늘 하루 벌이를 헤아려 본다. 5만 원이 넘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오경운 어르신이 근조기를 배달하는 모습그는 하루에 근조기 배달과 지하철퀵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 민병래

 
마지막까지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기를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6년 남짓. 10여 년간 해왔던 공공기관 경비를 그만두면서부터다. 그는 "힘 있을 때 내 손으로 일하고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겠다"며 한사코 말리는 아들 내외를 뒤로했다. 그리고 회사 근처 고시원에 자기 발로 들어갔다.

돌아보면 속초 앞바다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일이 뒤틀려졌다. 젊은 시절 고모부가 물려준 목재소는 장사가 쏠쏠했다. 당시 설악산 개발 붐도 덕을 보았다. 하지만 사업을 조금 더 키워보겠다고 1989년에 회사를 옮기면서 엇나갔다. 우선 낯선 땅에서 거래처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또 그때부터 플라스틱 제품이 목재를 대신하면서 수요가 많이 줄었다.
 
결국 목재소를 접고 다시 시작한 것이 섬유사업. 사우디로 트레이닝복 원단을 수출하는 일이었다. 장안평에 터를 잡고 오더를 받았지만 염색 실패로 1, 2차 클레임 끝에 파산했다. 모두 땡처분하고 건물주가 건네준 이사 비용을 받고 몸만 빠져나왔다.
 
나쁜 일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그때 아내가 간암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날부터 오경운은 두 남매를 챙기고 집안일을 돌보며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엉치뼈마저 다쳐 4개월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고단하고 쓸쓸한 중년이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오경운이 '근조기' 배달 일과 지하철 퀵을 하며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바로 길 찾기였다. 지도를 이리저리 찾아보고 전화로 몇 번씩 물어보고, 영어 간판 때문에 헛갈리고 핀잔도 많이 들었다. 맘고생이 많았던 초보 시절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익숙해져 '카카오맵'으로 길찾기를 하는 덕에 그 애로는 사라졌다. 더욱이 검색한 행선지도 어플 기록으로 남아 있고 세월이 쌓이다 보니 웬만한 곳은 이제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질 정도다.

그런데 가끔 정신이 깜박할 때가 많아 근조기나 서류를 놓고 전철에서 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이 황황하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을 탈 때 승강장 번호를 꼭 기억한다. 그래야 유실물센터에 잃어버린 위치를 정확하게 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게 좋기에 요즘은 물건을 꼭 끌어안고 있는다.
 
이렇게 해서 그가 한 달에 버는 돈은 1백만 원 남짓, 노령연금 25만 원과 중구청에서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10만 원을 합하면 방세 내고 용돈 쓰는 데 지장은 없다.
 
오경운은 남는 돈을 꼬박꼬박 저축하고 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일하다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설령 요양원에 가더라도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요양비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마지막 행선지 한티역에서 을지로 4가역까지는 한 시간이 안 걸려 도착했다. 지하철 출구를 나서니 멀리 북한산 쪽에서 다가온 자주색 노을이 오경운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 옷깃을 펼치니 시원하고 마음마저 개운하다. 오늘은 배달이 네 건이나 되었고 땀도 많이 흘렸다. 이런 날은 누군가와 소주라도 한잔 하면서 같이 저녁을 먹고프다. 
 

저녁을 곁들여 반주하는 오경운 어르신그가 즐겨찾는 곳 중 하나는 광장시장 순댓국집이다. ⓒ 민병래

고시텔로 향하는데 그가 가끔 들르는 소머리국밥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식당 앞에서 누군가 손짓을 하는 모양새다. 침침한 눈을 훔치며 바라보니 아담한 어깨선, 그윽한 눈매에 눈웃음까지... 아! 어제 밤 꿈에 만났던 아내, 틀림없는 아내의 모습이다.
 
오경운은 반가워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내려앉은 엉치뼈에 다리를 절며 바삐 걸어갔다. 손을 들어 기다리라고, 가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 말이 잘 안 나온다.
 
황급히 걸어가는 그의 손에 지난해 여름, 올해 여름에도 미루고 또 미뤄왔던 선풍기 한 대가 들려 있다. 그를 뒤따라가는 노을은 어느 틈엔가 보랏빛으로 바뀌어 늘어진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못다 한 이야기>

오경운 어르신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고 30여 년을 살았습니다. 처가에서는 이 점에 대해 특별히 고마운 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엄마 없이 자식들을 키우고 경제적으로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해 하며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가 특별합니다. 오죽하면 반찬을 해나르는 자식들에게 그마저도 하지 말라고 고시텔 위치도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인터뷰 내내 강조했습니다. 

<오경운의 B컷>
  

오경운 어르신의 미소그가 짓는 미소에 달관이 보이는 듯하다. ⓒ 민병래

오경운 어르신의 뒷모습이날 여름 내 미뤄뒀던 선풍기를 사서 흐뭇하게 고시텔로 향하는 뒷모습이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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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