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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18 07:51 수정 2019.09.18 07:51
저널리스트로 평생을 살아온 정연주 전 KBS 사장이 격주 수요일 '정연주의 한국언론 묵시록'으로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는 한국 언론에 대한 고발이자, 몸으로 경험한 '한국 언론 50년의 역사'다.[편집자말]
 

구겨진 신문들 ⓒ pixabay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종신 집권을 위해 유신을 선포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모든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를 금지했다. 대학은 휴교령으로 문을 닫았고, 언론은 비상계엄으로 엄중한 사전 검열을 받게 되었다. 계엄사령부 발표문이나 정부 당국이 배급하는 해설 기사는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하고 방송해야 했다.

1973년 8월 8일에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일본 도쿄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야만과 암흑의 시대였다.

이 칠흑 같은 암흑시대에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시위가 기적처럼 서울대 문리대에서 벌어졌다. 1973년 10월 2일이다. 이 시위로 서울대 문리대생 21명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시위는 멎지 않았다. 시위 주동자는 무조건 제적, 구속되었는데도 대학가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즈음, 나는 동아일보 사회부에서 경찰 출입을 하는 사건 기자였다. 내 담당 구역에는 대학이 많았다. 시위가 몇 군데서 벌어질 때에는 시위 현장에 도착하면 대부분 시위가 끝나 있었다. 경찰이 대거 투입되어 바로 진압했던 것이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하여 시위 참여 학생들을 찾아 시위 때 배포된 성명서를 구하고, 몇 명이 참가했는지, 구호는 어떤 것을 외쳤는지를 취재했다. 그렇게 취재했어도 기사는 나가지 못했다.

가장 절박한 언론의 과제는 단순한 '발생 기사' 보도
   

사건이 발생한 지 6일만에 실린 당시 동아일보 기사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유신독재의 그 강고한 성벽에 일격을 가한 서울대 문리대 10.2 시위조차도 신문·방송 그 어디에도 기사로 나가지 못했다.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철야 농성을 하면서 저항한 끝에 10월 8일에 가서야 뒤늦게 지면에 조그맣게 반영되었다. 그것도 시위 기사가 아니고, '서울대생 21명 구속'이라는 수사당국 발표 기사가 주를 이뤘고, 시위 관련 내용은 기사 끝부분에 한 줄 더해졌을 뿐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대학가 시위를 취재하고 저녁에 신문사로 돌아와서 내가 한 일은 취재한 것을 기사로 정리하는 게 아니었다. 주요 사건들을 모아서 기록해두는 편집국 '정보철'에 그날 취재 내용을 적어 놓는 것이었다. 그 정보철에는 대학가의 시위뿐 아니라 정치권과 사회 여러분야에서 있었던, 기사화되지 못한 주요 내용들도 많이 있었다. 진짜 뉴스가 신문에는 나가지 못하고 거기에 고스란히 있었다. 
 
어느 날 서울대 상대에서 시위가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현장에 가보니 시위는 끝나고, 시위 참여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입구에는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쌓아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늘 하던 것처럼, 성명서를 구하고, 몇 가지 물어보기 위해 농성장으로 다가섰다. 농성장 바리케이드 앞에 조그만 팻말이 하나 붙어 있었다.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

그 팻말을 보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 마침내 나는 개가 되었구나, 내가 선택한 직업,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언론이라는 조직이 개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부끄럽고, 참담했다.

언론 화형식도 등장

대학생들의 분노는 당연했다. 언론은 대학가 시위뿐 아니라 노동운동계에서 벌어지고 있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도, 종교계와 재야의 반 유신 저항 운동도 거의 보도하지 못했다. 언론은 분노와 타도의 대상이었다.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은 기자들을 향해 "기사로 나가지도 못하면서 취재는 왜 하느냐"라고 야유했다. 언론 화형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 권력과 그 이후 군부 독재 시절에 가장 절박한 언론의 과제는 단순한 '사실 보도'였다. 대학가의 시위, 노동자 농민의 저항, 종교계와 지식인 사회의 반독재 운동 등 단순한 발생기사조차도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5.18 광주 민주항쟁 때, 광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그 자체가 전혀 보도되지 않은 채 암흑에 묻혔다. 언론의 일차적인 기능인 사실(팩트)의 전달이 제거된 시대였다.

외부에서 가져다준 자유 속에서 방종, 무책임의 길로

언론에 물린 재갈이 풀리고, 언론자유가 조금씩 확대된 시기의 출발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다. 이 사실은 언론의 존재 이유, 언론의 가장 1차적 기능인 사실보도의 자유가 언론인들 스스로의 투쟁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6월 항쟁, 즉 시민혁명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말한다.

그렇게 시민의 항쟁 결과로 바깥에서 주어진 언론 자유는 그 뒤 계속 확대되어 왔다. 그런데 언론에 자유가 많이 주어진 만큼 언론은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회 공동선을 위한 공론의 장이 되어 왔는가. 아니면 밖에서 가져다 준 언론자유의 넓은 공간에서 거짓, 왜곡, 작문, 선정보도 등 제 멋대로의 방종과 무책임의 길을, 스스로 오만한 권력이 된 타락의 길을 걸으면서 언론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켜 왔는가.

일본 교도통신 서울지국장을 지낸 히라이 히사시 기자는 6월 항쟁 이후 한국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 이런 비판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한겨레> 1996년 5월 15일 자 창간 기념호에 기고한 글에서 1987년 6.29 선언 이후 한국 언론이 민주화되면서 보도량이 늘게 되고, 서울주재 특파원들의 한국언론 기사 인용의 숫자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는데, 그 늘어난 보도들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일본 기자의 지적 "북한과 일본에 관한 기사들이 오보가 많다"

 

2018년 5월, 북한소식통 인용해 ‘김영철 숙청설’ 보도한 조선일보. 이 역시 오보로 밝혀졌다. ⓒ 조선일보


"우리 특파원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한국 언론의 기사 신뢰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서울 주재 특파원들의 일 가운데 하나는 '옥석'이 혼재된 기사 가운데 어느 것이 '옥'이고, 어느 것이 '돌'인가를 식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특히 '알려졌다'는 표현이 들어간, 뉴스의 출처가 불명확한 기사는 일반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경험칙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밝혔다. 그러면서 그즈음 있었던 '알려졌다'는, 출처가 불명확한 한국 언론 기사 가운데 1면 머리기사로 나간 몇 가지 엉터리 기사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김정일 당시 북한 당비서의 이복동생인 김평일 핀란드 주재 북한 대사가 망명했다는 기사였다.

그는 한국 언론 기사 가운데 특히 북한과 일본에 관한 기사들이 오보가 많다고 말했다.

히사시 기자는 기고문의 끝 부분에 한국 언론과 한국 기자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1974년 가을 한국의 언론자유 투쟁 때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다음 해에 기자가 될 생각으로 이웃나라의 언론상황에 관심을 가졌다. 기자가 되기 전 나의 머리에는 한국의 기자들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가득 찼다. '언론자유'라는 직업윤리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한국 기자는 기자가 되려고 한 대학생을 크게 고무하는 빛나는 존재였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의 언론은 큰 민주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기사의 내용은 그 민주화에 비례하는 발전을 이뤘는가. 언론을 외부로부터 억압하는 '군사독재'는 사라졌으나 언론 내부의 '상업주의'라는 큰 걸림돌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히사시 기자의 이런 평가는 그래도 부드러운 편이다.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시절, 나는 한국언론에 대해 이보다 훨씬 더 혹독한 비판과 야유를 미국 관리들, 한반도 전문가들에게서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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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