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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8.28 09:50 수정 2019.08.28 09:50

최준례 무덤 (뒷줄은 김구와 곽낙원 여사이고 앞줄 왼쪽은 김신(둘째) 오른쪽은 김인(큰아들)이다. 비문 연월일이 ‘가나다라....’ 순으로 새겨있는데 ‘ㄹㄴㄴㄴ해’는 단기 4222년 ‘ㅂ해 ㄱ달 ㄱ날 죽음’은 ‘대한민국 6년(1924) 1월 1일 죽음’으로 풀이된다. ⓒ 동아일보

 
백범 김구(1876~1949)는 마흔아홉 살 되는 해 정월, 인생 동반자인 아내(최준례)와 사별한다. 1922년 9월 둘째를 낳은 최준례 여사가 폐병으로 상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24년 1월 1일 세상을 뜬 것.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이던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프랑스 조계지를 벗어나는 순간 일본 군경에 피체되기 때문이었다.
 
그해 2월 18일 치 <동아일보>는 최 여사 무덤(프랑스 조계 공동묘지) 앞에서 찍은 김구 가족사진을 싣는다. 신문은 "사회를 위하야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맛나(만나) 남이 격지 못할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멧천리 밧인(몇 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씨 부인 최준례(崔遵禮) 녀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라며 "늙은 싀모(시어머니),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엇지 참아 감기엇으랴!"라고 덧붙인다.
 
임정 피난시기 백범을 지킨 여성 조력자들
 

임정요인과 중국인들(앞줄 왼쪽부터 진동생 부인, 정정화 여사, 민영구 모친, 연미당, 주가예/ 뒷줄 왼쪽부터 진동생, 중국인, 김의한,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저봉장) ⓒ 조종안

 
백범은 삼일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한다. 이어 최준례 여사가 큰아들을 데리고 따라왔고, 프랑스 조계지에 집(영경방 10호)을 마련, 가족이 오붓하게 지냈다. 그러나 평소 병약했던 아내가 세상을 뜨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귀국한다. 이후 홀몸이 된 백범은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아 하는 정정화(1901~1991) 여사 도움을 받는다. 당시 정 여사는 김구, 이동녕 등을 친부모처럼 모신 것으로 알려진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시정부가 항주(항저우)로 옮겨가고 백범은 '상해항일구원회' 회장인 주푸청 도움으로 가흥(자싱)으로 피신한다. 주푸청 수양아들의 별채(매만가 76호)로 몸을 숨긴 백범은 '장진구', '장진'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뱃사공 주애보(朱愛寶)와 주푸청 큰며느리(주가예)에게 큰 도움을 받는다. 특히 서른일곱 살 아래인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 중국인 행세를 하며 대부분 시간을 조각배에서 지냈다.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 청사를 강소성 진강(鎭江)으로 옮긴다. 김구는 남경(난징) 회청교 부근에 거처를 마련한다. 정보를 입수한 일제가 암살대를 파견하자 가흥에 있는 주애보를 데려오는 결단을 내린다. 백범은 고물상 부부로 신분을 위장, 일제의 감시를 따돌린다. 하지만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 폭격으로 난징까지 위태롭게 되자 난징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주애보와 이별한다.
 
이동 버스에서 문득 떠오른 피난 시절 김구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셋째 날(3일), 일행은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항저우에서 서호(중국 10대 명승지로 꼽히는 거대한 인공호수), 임시정부 항주유적지 기념관, 애국지사들의 발자취가 서린 사흠방, 오복리, 청태 제2여사 등을 돌아보고 난징(남경)으로 이동했다.
 

바다처럼 보이는 태호(이동버스에서) ⓒ 조종안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난징은 항저우와 함께 중국 7대 전통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난징은 강소성 성도로 정치, 경제, 문화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한때는 국민정부 수도였으며 중국 민주혁명의 선두자로 알려지는 손문(쑨원) 선생 묘(중산릉)가 있다. 버스가 두 시간 남짓 달렸을까. 바다처럼 넓게 펼쳐지는 호수(태호)가 나타난다. 현지 가이드는 태호(太湖)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저기 오른쪽으로 보이는 게 태호입니다. 대단히 크죠. 면적은 정확히 2430평방킬로미터, 서울 면적의 네 배나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호수가 아니라 바다죠, 바다. 중국은 땅이 크니까 호수도 그만큼 넓은가 봅니다."
 

가이드 설명을 듣자니 언젠가 봤던 글이 떠올랐다. 자싱 매만가 76호(김구 피신처) 건물주 진동생(陳桐生)의 아들 진국침(陳國琛) 선생이 쓴 회고록이다. 진 선생은 아홉 살 때(1932) 집에 온 김구를 처음 봤고, 그때부터 어머니 지시로 '장씨 아저씨'라 불렀으며, 재청별장에서 돌아와 엄가빈(嚴家浜) 손영보 집에 피신해 있을 때도 자주 오갔다며 당시 추억들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주애보와 조각배 사진(항주 전시관에서) ⓒ 조종안

 
그의 회고록을 통해 어느 해 여름 뱃사공 주애보가 젓는 배를 타고 김구와 진동생 가족이 태호를 유람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태호에는 수십 개의 섬이 떠 있었다. 그중 절이 있는 어느 섬 꼭대기에 마검석(磨劍石)이라는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는 춘추시대 오자서(吳子胥)가 검을 갈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김구는 그곳을 떠나기 아쉬운 듯 산비탈에 선 채로 마검석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고 한다.
 
진 선생은 1943년 집을 떠나 사천(四川)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야 아버지의 귀한 손님으로만 알았던 '장씨 아저씨' 실명이 '김구'이고 한국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1990년대 중반 김신 장군이 쟝시(江西)에 있는 자신의 집을 방문해 나눈 대화도 소개했다. 이어 "하찮은 이 글이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한 애국 노인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면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덧붙였다.
 
어렴풋이나마 선열들 숨결 느껴
 

명·청 시대 건물이 이색적인 부자묘 거리 ⓒ 조종안

 
오후 1시 15분 항저우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후 5시 20분 난징 부자묘(夫子廟) 후문 주차장에 도착했다. 항저우에서 난징까지 소요 시간은 4시간 남짓. 말로만 듣던 부자묘 거리. 곳곳에 들어선 명·청 시대 특유의 건축물들과 인물상, 거리의 인력거 등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공자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어 '공자묘'로 부르기도 한단다.

그러한 연유로 중요한 시험이 다가오면 많은 학생과 학부모가 행운을 빌기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거리는 관광객과 산책 나온 주민이 뒤섞여 무척 혼잡하다. 현지 가이드는 이곳은 다른 유적지와 달리 일행에서 이탈하면 찾지 못한다며 주의를 당부한다. 탐방단은 옛 한인촌으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김종훈 기자 설명을 들었다.
 

한인촌 앞에서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 조종안

 
"윤봉길 의사 의거 후 김구 선생과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1933년 5월 회담을 합니다. 장소는 아시다시피 우리가 오늘 저녁 묵게 될 중앙반점(호텔) 뒤쪽에 있는 총통부에서 필담으로 하죠. 그때 결정된 사항 중 첫 번째로 낙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을 만들어요. 그 한인 특별반 출신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 장교가 되고 나중에 광복군이 되는데, 그 사람들이 남경에 돌아와 머물렀던 집단 거주지가 바로 여기에요.
 
여기에서도 윤봉길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항저우 청사 기념관에서 봤잖아요. 윤 의사 의거 후 김구 선생이 회담 준비를 위해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장제스 총통과 의자에 앉아 회담하는 모습. 그해가 1933년인데, 1935년까지 자싱을 오갔지만 진강으로 이동하는 1937년까지 2년 동안 난징에 머물면서 활동하죠. 그럼 어디에서 머물렀느냐. 지금 우리가 갈 회청교 아랩니다."
 

김 기자 설명이 끝나고 주위를 둘러보니 고층 건물들이 경쟁하듯 하늘을 가리고 있다. 벽에 내걸린 안내판엔 '교부영(教敷营) 4-16호', 기둥에는 '전복소구(全福小区)'라 적혀 있다. 가는 곳마다 감동과 안타까움을 교차하게 하는 독립운동 유적지들. 이곳 역시 옛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자주독립을 열망하던 선열들의 숨결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국화 한 송이로 애국지사들 넋 기려
 

회청교에서 내려다본 운하 ⓒ 조종안

 
일행은 혼잡한 부자묘 거리를 비켜 호젓한 골목을 돌아 회청교로 이동했다. 중간에 꽃집에 들러 국화도 열 몇 송이 준비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김종훈 기자는 태산목 꽃향기 그득한 다리 옆 고건물을 김구 선생 옛 거주지로 추정한다. 다리도 두 개가 있는데 붉은 글씨로 '회청교'가 새겨진 다리가 옛날부터 있던 것이고 하나는 최근에 설치됐단다.
 
"여기가 바로 회청교입니다. 장제스와 회담할 때 양복을 곱게 입은 분이 여기에서 고물 행상을 하신 겁니다.(어이없어하는 표정) 임시정부 국무령이면 지금의 대통령이에요. 그런 분이 이 다리 밑에서 고물상 행상으로 2년을 지냈으니...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난징도 위태로워지니까 실제 부부처럼 지내던 주아이바오(주애보)에게 100원을 줘서 자싱으로 돌려보낸 곳이 바로 여깁니다. 굉장히 귀한 장소에요."
 

김 기자 말대로 김구는 사태가 위급해지자 주애보에게 여비 100원을 주며 본향으로 돌려보낸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김구는 훗날 <백범일지>에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가흥(자싱)으로 돌려보냈다. 근 5년 동안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지내는 등 공로가 없지 않은데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 천만이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 4개월은 그야말로 고난과 고행의 대장정이었다. 그 역사의 중추적 인물인 백범 김구에게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 될 여성 조력자가 몇 명 있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비롯해 부인 최준례 여사, 뱃사공 주애보, 주푸청 맏며느리 주가예, 임시정부 산증인이자 안살림꾼으로 통했던 정정화 여사 등이다.
 
탐방단 일행은 회청교 다리 난간에서 묵념을 올리고 흐르는 물에 국화 한 송이 떠내려 보내는 것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조국 독립을 열망하며 숨져간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렸다. (계속)
 

회청교 위에서 김종훈 기자 설명 듣는 탐방단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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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