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20 15:52최종 업데이트 19.08.20 15:52
아버지 댁에 와서 동쪽 창 앞에 앉았다. 창 밖 멀리 과천 추사박물관이 있다. 아버지는 연전에 개울 돌다리를 건너 박물관까지 다녀오셨는데, 이제는 바지도 서서 입기 어렵고 돌다리도 건너기 어렵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몽골 텐트 두 동이 뾰족 올라온 곳을 가리키며, 그곳이 추사가 살던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고 말씀하신다.

일요일 오전, 어머니는 아버지와 교회 차량을 기다리시고, 나는 걸어서 과지초당을 가보려고 한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식사를 하신다면서 나 먹을 점심을 지어놓고 여수 돌산 갓지를 내놓으신다. 갓지 속에 들어 있는 흰 쪽파가 먹음직스럽다. 내가 하겠다는데도 굳이 점심상을 차려두시고, 손수 만든 걸쭉한 유산균 발효 음료까지 후식으로 먹으라고 내놓으신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뵐 때마다 약주 한 병씩을 들고 왔었는데, 이제는 아버지께 술을 선물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어제 밤에도 화장실을 드나드느라 잠을 설쳤다고 하신다.

병원을 다니시지만, 화장실 가는 주기가 더 짧아졌다. 이제 세상 어떤 약효가 있는 술이라도 아버지께 권하면 안 된다. 내가 몰두하는 술을 권할 수 없으니 아버지와 나의 세월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사람들은 나이 들어갈수록 바빠진다. 바쁜 일들은 대개가 반복된 일이기 일쑤다. 오래 일하여 익숙해지다보니 잘하고, 잘하기 때문에 빨리하고, 빨리하다보니 정신이 없어진다.

정신을 차리려면 느려져야 하고 두리번거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차라리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면 서툴고 낯설어 천천히 하게 될 텐데, 그래서 나는 때로 새로운 일을 해볼까 생각도 한다.

추사가 말년을 보낸 과지초당
 

과지초당 방 안에 걸린 추사의 글과 그림. ⓒ 막걸리학교


개울을 건너 양재 꽃단지를 지나 추사박물관이 있는 과지초당까지 갔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1824년에 과지초당을 조성했는데, 그때 추사는 아버지 일을 도왔다. 아버지 김노경이 별세하자 가까운 청계산 옥녀봉 아래에 모시고 추사는 삼년상을 치렀다. 추사는 1852년 8월 두 번째 유배인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로 이곳에서 인생의 마지막 4년을 보내다가 71살로 임종했다.

추사는 차를 좋아하고 술을 멀리했지만, 그래도 생이 고단할 때는 술을 대차게 마셨던가보다. 추사는 제주 유배 생활을 할 때 보리누룩으로 빚은 술을 마신 사연을 기록해두기도 했다. 
 

추사가 사용한 낙관 ‘통음독이소’ ⓒ 막걸리학교

 
그가 남긴 많은 낙관 중에 '痛飮讀離騷'(통음독이소)라고 새긴 도장이 있다. 통음(痛飮)은 사무치게 괴로울 만큼 술을 취토록 마신 상태를 뜻한다. 술기운의 괴로운 상태를 온 몸을 떵떵 울리는 종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통음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구사하는 표현이다. 술이 약한 사람은 졸음이 몰려오거나 토하거나 몸이 괴로워서 통음하기 어렵다. 추사는 통음독이소를 했다. 술을 한껏 마시고 '이소'를 읊었다. 얼마나 되풀이 했으면 낙관까지 만들고, 그 낙관이 닳기까지 했을까?

굴원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추사의 마음

'이소(離騷)'는 기원전 3세기에 초나라에 살았던 굴원이 쓴 모두 373행 2,490자로 이뤄진 장편 서정시다. '이소'가 2천년이 넘도록 전해오는 것은, 참된 신하를 거느리고 싶은 제왕이 좋아하고, 억울함을 당한 신하들이 자신의 처지를 빗대서 표현하기 좋은 시라서 일 것이다.

'이소'에는 하늘을 날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장면도 등장하여 판타지 같기도 한데, 충정을 바쳤건만 임금은 간신배의 모함만 듣고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절망스런 내용을 담고 있다.

굴원은 자신이 옳고 세상이 그르다고 탄하면서 창사의 멱라수에서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를 기려서 5월 5일 단오가 생겼다고 한다. 추사는 굴원의 '이소'를 읽고 통음했으니 그의 마음이 굴원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이소'의 한 대목을 읽어보면 이렇다.
 
긴 한숨에 눈물 가림이여 長太息以掩涕兮
백성의 삶에 어려움 많음이 슬프다 哀民生之多艱
나는 비록 삼가고 조심함을 좋아하였지만 余雖好脩姱以鞿羈兮
애써 아침에 간하고 저녁에 버림받았네 謇朝誶而夕替

아서라 已矣哉
나라에 사람 없어 날 알아주지 않는데 國無人莫我知兮
또 어찌 고향을 그리워할까? 又何懷乎故都
이미 함께 좋은 정치 할 만한 이 없는데 既莫足與為美政兮
내가 장차 팽함이 사는 곳을 찾아가리라. 吾將從彭咸之所居
 
팽함은 은나라의 충신으로 임금에게 직간을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에 뛰어들어 죽은 인물이다. 굴원은 자신의 뜻을 밝히고 팽함처럼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추사는 생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55세부터 64세까지 제주 유배를 당했고, 또 다시 66세부터 67세까지 북청 유배를 당했다.
 

추사가 과지초당에서 임종하기 사흘 전에 썼다는 ‘판전’ ⓒ 막걸리학교

 
두 번의 유배를 당하고 나자 생이 저물었고, 남은 세월을 과지초당에서 보냈다. 그는 통음할 만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참판을 지낸 김정희가 졸하였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책을 두루 읽었고, 금석문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했으며, 초서·해서·전서·예서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를 오묘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 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다.

그의 아우 김명희와 더불어 잘 어울리는 악기처럼 서로 화답하여 울연히 당세의 대가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서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귀양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다.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서 혹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견주기도 하였다. - <철종실록> 7년(1856년) 10월 10일
 
추사는 정치적으로 불행했지만, 그 불행이 추사체와 예술혼을 꽃피우게 만들었다. 그가 '통음독이소'의 낙관을 닳도록 찍으면서 읊조렸을 '이소'의 한 자락이 애잔키만 하다.
 
임은 내 마음 속을 살피지도 않고 荃不察余之中情兮
도리어 모함만 믿고 화를 내신다 反信讒而齌怒
나는 직언이 해로움이 됨을 알고서도 余固知謇謇之為患兮
차마 버려둘 수가 없다 忍而不能舍也
맹세코 하늘은 아시리라 指九天以為正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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