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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8.06 15:32 수정 2019.08.06 15:32

안창호 선생 체포소식 전하는 1932년 5월 1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윤봉길 의사 의거(1932년 4월 29일) 다음 날부터 신문들은 안창호를 포함한 애국지사 여러 명이 피체(被逮)됐다고 보도한다. 백범 김구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는 거액(20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곳곳에 밀정을 파견한다. 이에 백범은 '윤봉길의 홍구공원(현 루쉰공원) 의거는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한인애국단이 계획했으며, 애국단 단장은 자신'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다.
 
백범은 자신에게 내걸린 현상금이 (20만원에서) 60만 원(현 가치로 200억 원)으로 치솟고 감시망이 더욱 좁혀오자 절강성 가흥(현 저장성 자싱)으로 피신한다. 백범이 몸을 피신한 매만구 76호는 주푸청 수양아들 별채였다. 백범은 뱃사공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하고 선상생활을 하면서 중국인으로 행세한다. 이름도 '장진구', '장진' 등의 가명을 사용한다. 백범의 진외가(아버지의 외가)가 '장(張) 씨'였던 것.
 
1932년 초여름, 일제는 상해-항주 철도를 중심으로 김구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가흥 거리에도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이 수백에 달하였다. 지근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에게도 자신의 은신처를 알리지 않았던 백범은 주푸청 며느리(주가예) 친정 소유인 재청별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남북호(南北湖)가 굽어보이는 별장에서 그나마 안온감을 느끼며 생활하던 백범은 가장 위험했던 고비 6개월을 넘기고 다시 가흥으로 돌아온다.
 
풀 한포기도 친숙하게 느껴져
 

대나무가 울창한 재청별장 부근 풍경 ⓒ 조종안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관련 기사: 일본이 현상금 200억 내건 '장진'의 정체]
 
탐방 둘째 날(2일) 오전 10시 15분 상하이에서 출발한 버스는 12시쯤 저장성 자싱(嘉興)에 도착했다. 탐방단은 점심을 먹고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김구 피신처였던 매만가 76호,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거주지였던 일휘교 17호 등을 돌아보고 하이옌(해염)의 재청별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남북호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30분. 매만가에서 이곳까지 50분쯤 소요됐다. 일행은 매표소에서 별장까지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중국 현지 가이드는 "입구에서 별장까지 군가를 부르며 행진한 학생 탐방단도 있었다"고 귀띔한다. 순간,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도 옛날 의열단처럼 1km라도 걸어가 보자'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으나 참았다.
 
재청별장 방문은 두 번째. 그래서인지 안내판 글도, 풀 한 포기도 친숙하게 느껴졌다. 버스가 좁은 비탈길을 지날 때는 1932년 여름 주가예(주자루이)가 김구 선생과 동행, 가흥에서 기선을 타고 해염에 있는 자신의 친정에 들러 하룻밤 묵은 뒤 육리언을 지나 야압령을 넘어 남북호 재청별장에 도착하는 과정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김구 피난처 재청별장에서
  
재청별장은 서양식과 중국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남북호 풍경구의 최초 근대식 별장으로 알려진다. 청산녹수를 벗 삼아 지내려는 주찬경(주가예 숙부)이 1916년 신축했으며 그가 죽은 후 묘지를 관리하고 제사를 모시는 제각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다른 유적지에 비해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실내도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 일행을 흡족하게 하였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 정부 지원으로 복원되고 보호 유적지로 지정된 재청별장. 별장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대나무 숲과 이끼 낀 기와지붕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대문을 지나는데 한자로 음각된 목판 글씨('김구 피난처')가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선다. 인자한 모습의 김구 선생 흉상이 객들을 반긴다. 앞으로 다가가 잠시 묵념을 올린다. 자신의 아들, 며느리, 양아들까지 동원해서 김구를 비호해준 주푸청(저보성)과 그의 며느리 주가예(주자루이) 사진 앞에서 삼가는 마음으로 안내문을 읽는다.
 

김구 선생을 도와준 주푸청(오른쪽)과 주자루이(왼쪽) 사진 ⓒ 조종안

 
일행은 한·중 양국 관료와 정치인, 작가들의 방문 사진이 내걸린 전시실과 백범이 독서도 하고 임시정부 문서를 작성하면서 중국 혁명가들과 정보를 교환했다는 서재, 음식을 만들던 주방,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던 침실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그중 주가예가 김구 선생을 모시고 고개를 넘는 그림과 견학 온 상하이 한국주일학교 학생들 사진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김종훈 기자는 발길을 옮길 때마다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는 "실내 인테리어가 특이하고 정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작년 취재 때 상하이 일정이 너무 빡세게 잡혀 촬영감독이 치료받느라 여기(재청별장) 방문을 포기하는 바람에 더 북받치는 것 같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김신 장군이 쓴 '음수사원, 한중우의'가 음각된 기념비 ⓒ 조종안

 
붉은색 글씨로 '飮水思源 韓中友誼·음수사원 한중우의'가 음각된 기념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휘호는 김신 장군이 1996년 6월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아래는 김 기자의 부연설명.
 
"음수사원 한중우의... 물을 마시면서 그 근원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뜻이죠. 조금 아까 우리가 다녀온 매만가 기념관에도 이 글이 있었는데, 그럼 누구 글씨냐. 김구 선생 둘째 아들인 김신 장군 글씨에요. 1990년대에 한중수교가 되고 김신 장군이 주푸청 선생 일가를 찾아가 전한 아버지 말씀을 새겨놓은 것이죠. 다시 말해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김신 장군이 이렇게 남겨놓은 겁니다."
 

휘호에는 김구 선생이 자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준 중국인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담겼으며,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맺어진 한중우의를 어떻게 발전 시켜 나갈지에 대한 문제 제시로 받아들여졌다.
 
김구, 다시 가흥(자싱)으로 돌아오다
 

재청별장에서 바라본 남북호 ⓒ 조종안

 
중국으로 망명한 지 10년이 넘도록 명승지 구경은커녕 답답한 도시에서만 생활하였고, 그나마 일경의 감시와 밀정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 급급했던 김구 선생은 재청별장에 거처를 마련한 이후 매일 산에 오른다. 탁 트인 호수와 청잣빛 하늘, 풍광이 뛰어난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며 마음의 여유를 조금이나마 찾았던 것.
 
주변 마을의 장터 구경도 다녀온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상해 테두리 밖에 한 걸음도 내어놓은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대로 산과 물을 즐길 기회를 얻으니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지금도 남북호는 중국에서 드물게 산, 바다, 호수를 한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풍경구로 알려진다.
 

하이닝(海寧) 해변에 있는 ‘김구관조처’ 표지석(2005년 3월 제막) ⓒ 조종안

 
산에 오르면 앞으로는 호수, 좌우로 푸른 솔밭이 펼쳐지는 재청별장, 이곳에서 5~10km 떨어진 첸탄강(錢塘江) 하류에 '김구관조처'가 있다. 김구 선생이 답답할 때 혹은 조국이 그리울 때 바다를 바라보며 울분을 토해내던 장소다. 지금도 그곳 바닷가에 '김구관조처'가 새겨진 큰 바위가 놓여있다. '마오쩌둥 관조처'도 이곳에 있어 중국인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1932년 초겨울 어느 날, 나루터 장터로 구경 나갔던 김구 선생은 그 지역 경찰의 눈에 띄어 정체가 알려지게 된다. 일이 다급해지자 진동생, 엄항섭 등이 해염으로 건너가 선생을 모시고 돌아와 엄가빈(嚴家浜)에 있는 손영보 집으로 피신시킨다. 엄가빈은 10여 가구 정도의 자그만 마을로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도 6개월 정도 머문다.
 
동탑사(東塔寺)에도 잠시 피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동탑사는 가흥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사찰이다. 이곳에 머문 기간은 짧았지만,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11월 초 임시정부 요인들과 귀국을 앞두고 '동탑사에 피신하던 당시, 가흥 인민들의 도움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는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구 선생은 가흥에 머무는 3년여 동안 중국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살펴준 주푸청을 비롯해 뱃사공 주애보, 손영보 등에게 감동한 것. 손영보와의 뜨거운 우정, 출산한 지 한두 달밖에 안 된 산모임에도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고개를 넘든 주가예 뒷모습 등이 애틋한 휴먼스토리로 남아 훗날 <백범일지>를 장식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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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