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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6.27 10:35 수정 2019.06.27 10:35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본 영화 한 편이 어슴푸레 생각난다. <마음의 행로>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1942년에 제작되었으나 한국에서는 1954년에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에 깔린 반전 분위기는 6.25전쟁 후 상실된 한국인의 마음을 울렸다.

1918년 영국, 기억을 상실한 부상병 찰스는 거리로 빠져나와 쇼 무희인 폴라를 알게 되어 결혼까지 한다. 찰스는 원고를 쓰며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느 날 자동차 사고로 홀연히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반대로 폴라와 같이 산 기억은 상실한다. 그는 본가로 돌아가 부친의 유언에 따라 실업계에서 활동한다.

찰스는 사업가로 대성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 때문에 뭔가 늘 허전해 하며, 호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지낸다. 한편 폴라는 잡지에 난 찰스의 사진을 보고 찰스의 개인 비서로 일하게 되고, 사실을 밝히지 않고 찰스를 훌륭히 보필하며 지낸다.

찰스는 그녀가 자신의 아내였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찰스가 회사의 일로 예전에 살던 곳에 가는데, 이끌리듯 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호주머니의 열쇠를 꺼내 문을 연다. 그곳에 옛날 폴라의 모습을 한 지금의 아내가 서 있었다. 뭐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이당 김은호의 수제자 백윤문
                  

20대의 백윤문 ‘향당 백윤문’(백송화랑, 1981) ⓒ 백송화랑


그런데 한국 근대 미술계에도 이와 비슷한 비운의 이야기를 가진 화가가 한 명 있다. 그의 이름이 나오면 늘 이 이야기를 들춰내곤 한다. 그의 이름은 향당(香塘) 백윤문(白潤文, 1906-1979)으로 근대기의 대표적인 화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수제자였다.

백윤문은 서울 낙원동 출신으로 도화서 화원이었던 백은배(白殷培)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20세 때 김은호에게 그림 지도를 받기 시작하며 일찍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서화협회 회원으로 서화협회전에 출품하였고,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제6회부터 인물·꽃·새 등을 소재로 한 채색화를 출품하여 모두 10여회의 입선과 3회의 특선을 하고 '후소회(後素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김은호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백윤문은 김은호의 제자 중에서 장우성(張遇聖)이나 김기창(金基昶)과 같은 다른 제자들과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김은호의 화숙인 낙청헌(絡靑軒)에서 배웠지만, 친구 사이라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백윤문은 이들과 6, 7세의 나이 차이가 나기도 하고,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온 시기도 빨라 제자들 사이의 역할이 달랐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위치, 요즘 말로 하자면 '조교'와 같은 위치라 할 만하였다.

낙청헌은 와룡동에 있었는데, 창덕궁 돈화문 정면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백윤문은 익선동에 살았는데 김은호의 집과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걸어서 1분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백윤문은 스승을 빼닮은 솜씨로 듬뿍 사랑을 받았는데, 가까이 살며 스승의 일을 돕기도 하고, 그림 그리는 일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품작 '분노'와 기억상실증
 

백윤문 '분노' 1935년 '절필시대'(국립현대미술관, 2019) ⓒ 국립현대미술관


백윤문의 삶은 이렇듯 순조로운 화가의 길이었지만, 하늘은 그에게 스승의 사랑만 받는 꽃길만 걷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잘 나가던 그에게 갑자기 '기억상실증'이란 불행의 그림자가 닥쳐온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기억상실증은 조선미전에 출품한 작품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하기도 한다.

백윤문은 1935년 조선미전에 '분노'라는 작품을 출품한다. 이 작품은 채색으로 그린 인물 풍속화인데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 특선에 뽑혔다. 그러나 내용이 일제의 심기를 건드려 입선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장기를 두다가 다투는 내용이다. 한 일본인이 술에 취해 장기판을 뒤엎고, 한국인에게 행패를 부린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차지한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성을 풍자한 것이라 생각하여 특선에서 배제했다는 것이다.

결국 백윤문은 일제의 심문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을 얻어 기억상실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가 1942년이었다. 이후 그는 병에 시달리며 화단을 떠나게 되었다는 매우 극적인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유로 백윤문은 결국 절필을 해야 했고 오랫동안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러던 백윤문이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70세가 넘어 기적적으로 기억을 되찾아 다시 미술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1978년에는 재기의 전시회를 열어 성황리에 끝나자 사람들은 그의 재기를 영화에 빗대어 한국판 '마음의 행로'라 불렀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은 탓에 솜씨는 무뎌져 작품의 수준은 높지 못하였으나 그의 불굴의 의지만은 높게 평가되었다. 이듬해 미국의 워싱턴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수익금을 스미스소니언박물관 한국실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백윤문의 대표작 '건곤일척'
            

백윤문 '건곤일척' 1939년 '절필시대'(국립현대미술관, 2019) ⓒ 국립현대미술관


백윤문의 작품은 비교적 남아 있는 것이 적은 편이다. 특히 기억상실이 오기 전인 1942년 이전의 작품은 매우 적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 중에서 백윤문을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 '건곤일척'이다. 한국의 노인 네 사람이 마당에서 윷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제작 방식 면에서 스승인 김은호의 작품과는 매우 다르다. 김은호는 주로 여성의 삶을 소재로 하여 천에 얇게 색칠하는 감성적인 채색화를 많이 그렸다. 그런데 백윤문의 이 작품은 밑그림을 바탕으로 두꺼운 천위에 호분과 진한 채색으로 화면 전체를 두껍게 칠하는 방식의 채색화이다.

이러한 방식은 전형적인 일본화 그리는 방식인데, 이는 당시 조선미전에 출품하던 화가들이 주로 하던 작업 방식이었다. 백윤문도 처음에는 스승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작품 제작을 하였으나 1930년대 들며 점차 조선미전 주최 측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의 내용도 한국의 전통적인 풍속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 또한 조선총독부가 권하던 오리엔탈리즘, 곧 식민지의 '향토색'을 드러내는 작품을 선호하던 주최 측의 경향에 따르려는 의도가 다분히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한국의 풍속을 잘 표현하였고, 채색을 다루는 솜씨가 꽤 높은 경지에 오른 수준 높은 작품이라 할 만 하다.

또하나의 대표작 '축수도'
 

백윤문 '축수도' 1940년 '절필시대'(국립현대미술관, 2019) ⓒ 국립현대미술관

 
백윤문의 작품 중에 특이한 것이 하나 전한다. 1940년 박충주(朴忠柱)라는 이의 부탁으로 '규암(圭菴)'이란 이의 환갑을 기념하여 그린 '축수도'이다. 당시에 제작된 특별한 종이에 그렸는데, 종이는 주변에 봉황 두 마리가 둘러 있고, 아래쪽에는 매화가 그려져 있고, 위 아래로 '수복(壽福)'이란 두 글자가 적혀 있는 고급 종이이다.

한 장에는 '괴석'과 '불로초'를 그렸다. 돌이나 불로초 모두 장수를 기원하는 소재이다. 괴석의 '수수준투(秀痩峻透)'하는 변이가 좋고, 불로초의 모양과 색감이 감각적이다. 그의 재빠른 손재주와 넉넉한 그림 재주를 느끼게 한다.

또 한 장에는 규암이란 이의 인간적인 면모를 칭송하려는 듯 대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예로부터 강직한 선비의 면모를 나타내는 대나무는 남성의 통과의례 축하 일에 선물로 주는 그림으로는 가장 선호한 소재였다. 굵은 가지와 잔가지 죽순을 섞어 그렸는데 역시 단정하다.

다른 한 장에는 송학도를 그렸다. 스승이 재주를 칭찬했듯 김은호의 송학도를 빼 박은 듯 단정하기 이를 데 없다. 단정하기도 하고 섬세하기도 한 그림의 풍모가 외곽의 화려한 장식적 문양과 잘 어울려 잔칫집의 화려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듯하다. 마지막 한 장에는 이 그림을 그린 내력을 적어 놓았다.

"1940년 늦가을 중순에 송원 박충주의 부탁으로 규암 선생의 환갑을 위하여 그린다. 향당 백윤문"

이 작품은 백윤문의 단편 작품들이지만 그림이나 글씨 등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그러나 36년이란 긴 공백을 가진 후 재기한 이후의 그림은 구성이나 필치, 글씨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화가의 면모를 보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기억상실증이란 천형으로 전성기를 놓쳐 버린 '비운의 화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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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