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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04 08:24 수정 2019.04.04 08:24
 

남계우 ‘나비’. ⓒ 칸옥션


화가들마다 자신이 잘 그리는 그림이 있다. 조선후기 화가인 남계우는 나비를 잘 그려 '남나비'라 불렸고, 이후 이경승은 '이나비', 정진철은 '정나비', 서병건은 '서나비'라 불릴 정도로 한 때 나비 그림이 유행하였다. 또한 허련은 모란으로 유명하여 '허모란'이라 불렸고, 장승업은 청나라 상해화파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기명절지' 그림으로 유명하였다.
 
김정희의 유명한 난초는 이하응, 윤영기, 김응원 등으로 이어져 화맥을 형성하였으며, 평양화단의 좌장 양기훈은 '노안도'를 잘 그려 황해도 지역 북쪽 화단에 노안도가 크게 유행하였다. 김윤보는 '풍속도'의 명인이었고, 그의 영향을 받은 김준근 등이 이어 받아 개화기 외국인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이 되었다.
 
근대기에는 이상범이 섬세한 감각으로 '한국의 산야'를 그려 자신의 미술세계를 구축하였으며, 변관식은 남성적인 필치로 '금강산'을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였다. 김은호는 일본 색채 가득한 '초상화'와 '미인도'를 잘 그렸고, 이한복은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한 까닭에 '일본화풍'이 드러나는 감각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다. 이용우와 최우석은 장승업에 버금가는 빠른 필치로 '신선도'나 '화조화'를 그렸다. 또한 박승무는 눈 내린 풍경을 잘 그려 '설경의 명수'라는 호칭이 있었다.
 
또한 이들 외의 화가들 중에는 자신이 공부한 주 전공 밖 분야에 재주가 있어 실제 전공 분야보다 더 유명해진 경우도 있다. 특히 근대 화가들 중에 많은데 서구식 출판문화가 유입되어 새로운 미술 문화가 만들어져 새로운 수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서양화가 이승만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본래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으나 신문 삽화를 그리며 유명해져 삽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정현웅 또한 서양화를 공부하였으나 책의 장정과 삽화로 이름을 떨쳐 수많은 책과 잡지의 표지와 삽화를 그렸다.
 
한국 만화의 탄생과 노수현

책의 표지나 삽화와는 또 다른 새로운 출판 미술도 생겨났다. 근대기에 신문과 잡지가 만들어지며 생긴 '만화(漫畫)'이다. 이미 일본에서는 만화가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분야였다. 한국 만화를 개척한 이 또한 화가들이었다. 한국 근대기에 만화 작업을 하여 한국 만화의 시작을 알린 작가는 이도영(李道榮, 1884-1933)과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이다. 일본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한 이들이 주로 만화를 그렸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동양화를 전공한 이들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한국 최초의 만화가라 할 만한 이는 이도영이다. 이도영은 안중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한 뛰어난 동양화가이기도 하지만, 1909년 '대한민보'에 한국인 최초로 만화를 실어 한국 만화의 개척자라 할 만한 인물이다. 그의 만화는 한 면으로 된 만평 같은 것이었는데, 시대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주로 일본 제국주의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사회의 부조리나 이에 부화뇌동하는 인물의 사회적 활동을 우스꽝스럽게 비판하는 내용들이다.
 
이도영의 뒤를 이어 만화를 본격적으로 그린 이는 김동성과 노수현이다. 김동성은 미국 유학을 한 화가로 1920년대에 4면 만화를 <동아일보>에서 연재하여 '이야기가 있는 만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노수현이 <조선일보>에 '멍텅구리 헛물켜기'라는 만화를 연재하여 만화가 대중화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노수현은 만화가 이전에 뛰어난 동양화가로서 이미 큰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등장은 한국만화가 발전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와 동문수학했던 이상범도 이미 삽화로서 이름을 날렸고, 노수현은 삽화뿐만 아니라 만화에까지 재능을 보여 안중식 문하의 두 사람이 모두 출판 미술에 종사하며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노수현 ‘멍텅구리’. <신시대>(1941. 1. 1)에 실린 것. ⓒ 황정수


한편 노수현의 만화 '멍텅구리'는 1941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월간지 '신시대'에 군국주의를 선동하는 노골적인 내용을 연재하여 후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 잡지 '신시대'는 친일파 노익형이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위한 세기적 대전환기에 필요한 신시대의 대중교양"을 표방해 창간한 것이었다. 여기에 실린 만화 멍텅구리는 김은호나 김기창 등 다른 화가들의 그림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선동 내용을 담고 있어 문제가 되었다.
 
동양화가로서의 노수현
 

노수현 30대 모습. <심산 노수현>(예경산업사)에 실린 사진을 다시 촬영했다. ⓒ 황정수

  
만화와 삽화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역시 노수현의 화가로서의 본령은 동양화이다. 그의 뛰어난 동양화 실력은 노수현이 만화에서도 좋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의 그림 실력은 서화미술회에서 공부하며 든든한 토대를 쌓는다. 서화미술회 스승인 안중식과 조석진은 장승업의 후예들이니, 노수현 또한 장승업에서 이어지는 조선의 전통 화맥을 이은 화가라 할 수 있다.
 
노수현은 황해도 곡산 태생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조부 노헌용의 집에서 살았다. 일찍이 조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옥인동에 살며 보성소학교에 다녔다. 소학교 때부터 일찍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소학교에서는 사생에 바탕을 둔 근대적 도화교육이 실시되고 있어 평생 화업(畵業)의 밑거름이 되었다.
 
1914년 소학교 졸업 후 수송동에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다. 고보 1학년 때 지도 제작 숙제를 하던 중 미술에 재능이 있음을 확신한다. 그래서 조부의 허락을 받아 학교를 중퇴하고, 백목다리(지금의 신문로)에 있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안중식, 조석진 두 스승의 사랑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여 1918년 제4회 졸업생으로 서화미술회를 졸업한다. 동기로는 이상범과 최우석이 있었다.
 
그는 서화미술회에서 이상범과 함께 안중식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두 사람은 3년 과정의 서화미술회를 마친 후에도 청진동에 있었던 안중식의 화실 경묵당(耕墨堂)에서 계속 공부를 한다. 특히 안중식에게 의뢰되는 작품이 많아 스승이 힘에 부칠 때에는 이상범과 노수현이 대신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안중식은 두 제자에게 자신의 아호 '심전(心田)'에서 한자씩을 나누어 주고 호로 만들어 쓰게 한다. 그렇게 얻은 호가 '심산(心汕)'과 '청전(靑田)'이란 호이다. 청전은 '청년 심전'이란 뜻이고, 심산은 '조선의 산'이란 뜻이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
   

노수현 ‘추경산수’. <심산 노수현>(예경산업사)에 실린 작품을 다시 촬영했다. ⓒ 황정수

 
1919년 안중식이 세상을 떠나고 작업에 몰두하던 노수현은 1921년 고희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신문만화를 그린다. 이런 사회 활동을 하며 당시 한국 화단에 물밀듯이 유입된 일본미술과 서양미술을 접하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가 일본 유학을 하지 않았음에도 신남화풍의 화풍을 보이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1921년부터는 서화협회의 전람회에 해마다 출품하였으며, 1922년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조선미술전람회를 창설하자 출품하여 특선과 입선을 거듭하며 동양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그러나 1932년을 끝으로 조선미전에는 더 이상 작품을 출품하지 않고 서화협회전에만 출품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갈수록 강압적으로 치닫던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무언의 반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 마지막 시기를 힘겹게 보낸 노수현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다. 서화협회전에서 주로 활동한 노수현은 일제 잔재 청산 분위기에 따라 많은 기회를 얻는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동양화부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48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미술과 강사로 출강하면서 경제적인 안정도 이루었다. 이후로 그의 인생은 승승장구하였다. 조선미전의 뒤를 이어 새로이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이 되었고,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정년퇴직 후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노수현의 미술세계 
 

노수현 ‘폭포’. <심산 노수현>(예경산업사)에 실린 작품을 다시 촬영했다. ⓒ 황정수

 
노수현의 미술세계는 철저하게 산수화라는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서화미술회에서 공부한 화가들이 대부분 여러 갈래의 화목에 모두 능하였지만, 노수현은 화조화나 영모화, 사군자 등은 잘 그리지 않고 주로 산수화에 몰입하였다.

그가 유독 산수화에 몰입한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1970년대 어느 날 서예가 김충현이 노수현에게 산수를 즐겨 그리는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노수현은 "세상에 대한 울분을 푸는 데에는 산수화만한 것이 없어"라고 말한다. 한 때 이 '울분'이란 것을 일본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서화협회전이나 조선미전에 출품하던 노수현의 초기 그림은 스승을 이어받으면서도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던 시기이다. 처음에는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아 산의 형태나 수지법 등에서 중국화보를 꾸준하게 학습한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노수현은 1923년이 되자 서화미술회 동문인 이용우·이상범·변관식 등과 함께 전통적인 화풍의 답습을 지양하기 위해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여 새로운 화풍을 모색한다. 그러나 이 조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노수현의 개성적인 화풍이 자리 잡은 것은 1950년대부터 6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이다. 그는 초기의 다양한 방법으로 화풍 모색을 하던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산수화 정형을 수립한다. 살짝 붉은 색조의 바탕에 갈색의 담채로 구사된 기암괴석의 바위산과 그 위에 갈필의 먹으로 표현한 바위 주름, 초록색의 점묘로 표현된 나무들이 자아내는 전체적인 형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감과 함께 환상적인 흥취를 불러일으키는 장점이 있다.
 

노수현 ‘춘경산수’. <심산 노수현>(예경산업사)에 실린 작품을 다시 촬영했다. ⓒ 황정수

 
노수현의 독특한 형식의 산수화에 대한 해석은 1970년대 작가 자신이 술회한 이야기에서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1974년 노수현은 회고전이 끝난 이후 여러 사람들과 자주 국내 각지를 여행하였다고 한다. 그런 여행길에서 그는 자주 우두커니 혼자 앉아 주위 산천의 경관을 살펴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마침 그 때 동행한 한 젊은 여성이 관심을 보이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 먼데 나무들을 보아. 점처럼 보이지? 내 그림의 점화(點畵)를 이해할 수 있겠나."
 
이 몇 마디 말에서 노수현의 산수화에 보이는 정갈한 화면과 독특한 점묘 표현이 인상적인 그의 화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대략이나마 엿볼 수 있다.
  

노수현 ‘만학천봉’. <심산 노수현>(예경산업사)에 실린 작품을 다시 촬영했다. ⓒ 황정수


또한 노수현은 특히 금강산이 가진 기운찬 바위의 매력에 매료되어 기이한 바위의 소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의 산수는 늘 단단한 바위와 다양한 바위산이 중심이 되었다. 거기에 부드러운 나무와 수풀의 대조, 중경과 원경 사이의 운무, 그리고 사실적이면서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기이한 바위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을 보여준다. 노수현은 1974년 12월 서울신문에 기자이자 평론가인 이구열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산(陸山), 다시 말해서 흙산보다는 바위산이 좋고, 또 내 화의(畵意)에 맞아. 젊었을 때 나는 전국의 명산을 다 돌아보았는데 역시 산은 금강산이야. 그보다 더 좋은 산이 없더군. 그것이 온통 바위산이야. 묘향산이 더 좋다는 사람도 있으나 나로선 그렇질 않아."
 
이런 말에서 보듯 노수현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화려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산야는 금강산의 모습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경원선 철도가 생겨 금강산에 쉽게 오르게 되자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을 찾아 금강산을 그리는 풍조가 생겼다. 노수현도 이러한 금강산 열풍에 호흡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노수현은 바위산을 중심으로 나무와 수풀을 점묘로 그리는 산수화를 주특기로 하였다. 이러한 것은 모두 그의 산수화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바탕이 된 것이다.

한편으론 동양화의 유려한 필법을 바탕으로 삽화나 만화를 잘 그려 이름을 내기도 하였다. 삽화와 만화가 비록 당시 자신이 추구하는 미술의 본령은 아니었으나, 근대 삽화와 만화 발전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노수현은 일제 말기 활동으로 비록 친일 미술인이라는 시비가 있지만, 미술사 내적인 부분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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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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