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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02 08:34 수정 2019.04.02 08:34
4년 전 나는 매일 밤마다 계산기를 두드리고 앉아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같은 생각뿐이었다. 이번 달은 월세를 낼 수 있을까. 당시 나에게는 책임져야 할 월세가 두 개 있었다. 내가 사는 원룸과 운영하는 춘천 카페의 월세. 하루가 멀다 하고 주위에 프렌차이즈 카페가 생기니 한숨은 늘고, 인건비는커녕 월세와 각종 공과금을 걱정하고, 재계약 때마다 월세를 올리는 집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장사가 안 되는 날이면 아메리카노 한 잔만 시키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손님이 얄미운 날도 있었고, 큰 소리로 떠드는 중년 남성들에게 괜히 부아가 치미는 날도 있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인연과 기쁨과 추억도 켜켜이 쌓여갔지만, 아무리 일해도 마이너스가 반복되는 상황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당시 장사에 눈 밝은 선배들에게 다양한 조언을 들었다. 조언 중에 공통적으로 나왔던 말은 소비층을 바꾸라는 말이었다. "춘천은 공무원이 많잖아.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돈을 팍팍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주 소비자로 잡아야지." "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가격이나 메뉴의 질을 높여 봐." 솔깃했지만, 명색이 인문학 카페의 이름을 달고 처음부터 내세운 '문턱 낮은 문화 공간, 인문학카페 36.5˚'라는 가치를 접을 수는 없었다. (사실 주 소비층을 바꾼다고 해도 공무원들이 우리 카페에 굳이 찾아왔을지는 모르겠다.) 

나와 동료들은 성별이나 연령, 인종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가끔 동네 어르신들이 찾아와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의 차이를 묻기도 했고, 학교 밖 청소년들이 놀러오면 카페 구석에서 함께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아이를 데리고 조심스럽게 "아이도 들어가도 되나요?" 묻는 엄마들도 있었다. 카페 한편에 있는 그림 도구를 건네면 아이는 그리기에 몰두했고, 엄마는 편안하게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비록 돈은 못 벌어도 이런 순간만으로 괜찮다고 여기는 하루하루였다.

어느 날 아침,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 거기 인문학카페인가요?
- 네. 맞습니다.
- 제가 한 번 가보려고 하는데요. 카페가 1층에 있나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나 해서요.
- 아아, 저희 카페는 2층에 있어요. 엘리베이터도 없고, 계단도 좁고 가파른 편이어서... 


여기까지 안내했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마음에 몇 가지 말을 덧붙여버렸다.

- 그래도 혹시 오신다면 저희 팀원들이 훨체어를 들어서 옮겨드릴 수도 있습니다!
- 아, 네. 가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내심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전화 통화 이후 카페가 다르게 보였다. 2층까지 올라오는 일도 난관이었지만, 2층 카페 현관문은 좁은 편이어서 휠체어가 들어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고, 복도에 있는 화장실도 두 개의 턱을 넘어야 했다. '문턱 낮은 문화공간'이라고? 누구에게 문턱이 낮은 건데? 내가 사용한 언어에 내가 걸려 넘어져 버린,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버린 아침. 나도 모르게 공간은 '노휠체어존'이 되어 있었고, 어쩌면 눈치 채지 못했을 뿐 누군가에겐 문 없는 벽 같은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게는 내 카페가 '노휠체어존'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 pixabay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당분은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꾸준히 장애인권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몸'을 주제로 글을 나눴을 때, 당분은 이런 글을 적었다

"작년에 영화상영회를 하려고 3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을 수용할만한 공간을 알아보러 다닌 적이 있다. 서울 시내에 많은 공간을 알아보았지만, 휠체어 이용자도 접근 가능한 공간을 찾기는 어려웠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장애인이나 휠체어 이용자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접근 가능한 공간이 없다는 게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몇 개의 선별한 공간들을 방문하며 휠체어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인지, 장애인 화장실은 있는지 확인하고 다녔지만, 막상 가보면 지하철에서부터 수많은 턱들과 비좁은 통로로 목적지까지 도달하기가 불가능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비장애인 서른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는 비교적 쉽지만, 서른 명 중에 휠체어 이용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얘기가 달라지더라는 이야기였다.

건물과 구조, 제도, 인식 기준이 '정상적인 소비 주체'를 중심으로 기획된 사회에서 정상성의 범주를 조금이라도 넘은 사람은 출입할 공간 한 평을 찾기가 어렵다. 카페를 운영할 때를 떠올려보면 아이를 데리고 오는 엄마들은 대부분 현관 앞에서 망설이며 출입이 가능한 지 물었고, 아침에 통화한 그 역시 휠체어가 출입가능한지 먼저 물었다. 얼마 전에는 4개월 된 아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탄 엄마가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미리 과자와 귀마개, 양해 편지를 200개 준비한 이야기가 미담처럼 퍼졌다. 누구는 아무렇지 않게 입장표를 내밀 수 있지만, 누구는 몇 번이나 '민폐가 되면 어떡하지, 내가 갈 수 있는 곳일까, 입장이 허락될까' 곱씹고 확인하고 용기내야 하는 불합리다.

노키즈존이 차별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마치 노키즈존 논의가 자영업자의 생계 대 엄마와 아이의 권리 대결인 것처럼 부추기는 흐름이 있다. 그런데 과연 과연 자영업자의 생계는 몇몇 아이와 엄마 때문에 어려워지는 걸까. 2017년부터 소상공인 폐업률이 창업률을 앞지르고 있고, 이마저도 정확한 공식 통계가 없어서 자영업자의 현실을 진단하기는커녕 적합한 개입을 위한 기초 토대도 없는 형편이다.

자영업자의 생계를 쥐락펴락하는 건 멈출 줄 모르는 높은 월세와 젠트리피케이션, 대기업 중심의 문어발식 확장과 갑질 문화, 복지 제도의 미비와 노동의 빈곤화 때문이다. 생계라는 무거운 짐을 개인이 감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약한 개인이 아닌 구조에 정확한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한편에서는 아이를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다른 손님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 것"이라며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 또한 장소의존적"이라고 말한다. 묻고 싶다. 우리가 상상하는 손님의 범주, 권리의 범주는 어떤 모습으로 제한되어 있는지. 노키즈존, 노노인존, 노여성존, 노장애인존, 노성소수자존, 노동물존, 수많은 노○○존의 중심에는 소비 자본주의의 소비주체 인정 여부가 있고, 소비주체의 자격 역시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정상 인간의 범주가 전제되어 있다. 

익숙한 질문, "지난 주말 어떻게 보냈어?" 익숙한 대답, "나 그때 말했던 맛집 갔다 왔어." 추천 맛집 리스트를 보며 주말 나들이를 선택할 수 있는 일상, 주머니만 두둑하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모두에게 주어졌을까? 차별은 내가 누리는 자리와 떨어져 있지 않다.
 

홍승은 작가 ⓒ 봉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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