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14 10:21최종 업데이트 19.02.14 10:21

경극 패왕별희 전시물 (중국 장쑤성 쑤첸시 항우 생가) ⓒ 김기동


중국을 대표하는 단어에는 '한'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많다. 한자, 한문, 한시, 한족, 한약 등등이 있다. 여기서 '한'자는 중국 한나라를 뜻하는데, 한나라는 기원전 206년 유방이 세운 나라다. 그래서 중국이라는 국가와 사회조직, 그리고 중국 민족 형성이 한나라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 사람들이 당연히 한나라를 세운 유방을 존경하고 좋아해야 하는데, 중국 사람은 한나라 유방보다는 오히려 유방에게 패한 초나라 항우를 더 좋아한다. 항우와 우희의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한 <패왕별희> 경극과 영화가 중국 사람에게 인기가 많다는 사실이 그 증거 중 하나다. 


중국 사람은 왜 유방보다 항우를 좋아할까?

유일무이한 사람
 

항우 동상 (중국 장쑤성 쑤첸시 항우 생가) ⓒ 김기동

 
중국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 역사에서 권력 다툼에 패한 사람은 대부분 역적으로 취급되어 환영받지 못한다. 간혹 패하더라도 이름을 남겨 후세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있기는 하다. 우리나라 고려 시대 정몽주나 중국 삼국시대 제갈공명이나 관우가 그런 경우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은 대부분 멸망한 나라의 군주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들이다. 그래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필요가 있을 때, 국가 차원에서 이런 인물을 의도적으로 띄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항우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이 황제(왕)가 되려고 한 인물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은 그를 서초패왕 항우라고 부른다.

사마천은 <사기> <항우본기>에서 "항우는 당당하게 내세울 권위가 아무것도 없었으면서도 삼년 만에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을 서초패왕이라고 했다, 항우는 비록 끝이 좋지 않았으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외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사마천(기원전 2세기) 시대까지 중국에서 항우 같은 사람은 유일무이했다는 이야기다.

사마천이 항우를 왜 그렇게 평가했는지 살펴보자. 항우 할아버지는 초나라 대장군이었다. 현대로 치면 초나라 군대를 지휘하는 국방부 장관 정도다. 그렇지만 항우 할아버지는 진나라 전투에서 죽었고, 초나라도 망했다. 그래서 항우는 어려서 삼촌 집에서 자랐다.
 

중국 장쑤성 쑤첸시 항우 생가 ⓒ 김기동

 
항우는 스물네 살 때 삼촌을 따라 진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자신의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삼촌이 전쟁터에서 죽자, 항우는 혼자 남게 된다. 삼촌이라는 배경이 없어지자, 항우는 초회왕에게 견제를 받아 어려운 북방 전쟁터에 내몰린다. 초회왕은 산에서 양치기로 살다가, 항우 삼촌이 왕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래서 아마도 초회왕은 항우가 북방 전쟁터에서 죽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이때 유방은 초회왕의 지원으로 함양(진나라 수도)에 진격하여 손쉽게 함양성을 장악한다.

하지만 초회왕의 바람과 다르게 항우는 북방 전쟁에서 승리하여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초패왕이 된다. 이때 항우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다. 항우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삼촌이 죽자 금수저가 흙수저로 변했는데, 다시 자신의 힘으로 일어선 것이다.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항우는 화를 잘 냈다고 한다. 사람이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면 주변 사람이 피곤해진다. 하지만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표리부동하지 않고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솔직하다는 의미도 된다.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이 그의 마음속 생각을 쉽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에 속기 쉽다.

'홍문연'은 항우가 함양성을 장악한 유방을 죽이려고, 유방을 초대한 술자리가 열렸던 장소다. 그래서 중국에서 홍문연이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가 있다.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은 겉으로는 우호를 내세우면서, 안으로는 살기를 숨기고 있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모임에 참석하는 당사자들은 대충 넘어갈 것 같지 않아 보이고 대응하기 힘들 게 분명하나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모임에 참석할 경우 '홍문연'이라고 한다.

항우의 초청으로 홍문연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던 유방은 자신을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라고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의미다. 하지만 항우의 마음속 생각을 정확하게 읽고 대처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항우는 유방에게 자신의 마음속 생각을 읽혔기 때문에 유방에게 쉽게 속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항우는 솔직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멍청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이런 항우의 인간적인 모습을 좋아하지 않나 추측해 본다.

항우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켰다. 항우는 전쟁에서 패배를 앞두고 우리나라 사람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건만(역발산기개세. 力拔山氣蓋世), 시운이 불리하니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구나!"

다른 사람이 항우를 '역발산기개세'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항우 자신이 자신을 산을 뽑고 세상을 덮을 만한 기개를 가졌다고 표현한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알 수 있다.

또 항우는 전투에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과거 자신의 부하 장군이었으나 배신하고 한나라 유방에게로 도망친 장수를 만나자 그에게 말한다. 

"이게 누군가. 오랜만에 만났네. 듣자 하니 한나라에서 내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게 상금 천 냥을 준다고 하던데, 너에게 내 머리를 주겠네."

항우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항우는 마지막 전투에서 한나라 한신 장군에게 쫓겨 강가에 이르렀을 때, 어부가 배를 몰고 나타나 자신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고향에 가 다시 재기하라고 한다. 항우는 "내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간다 한들, 또 그곳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추대한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느냐?"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자존심 강한 항우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패배
 

항우 동상와 항우 고향 시내 모습 (중국 장쑤성 쑤첸시 항우 생가) ⓒ 김기동

 
항우는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가 분명해지자 "내가 전쟁터에 나선 지 8년 동안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 패배하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항우는 마지막 전쟁에서 패하여 죽기 전까지,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항우는 왜 이 전투에서 패하여 초나라도 멸망하고 자신도 죽었을까?

중국 역사가들은 항우가 국지적인 전투에서는 수없이 승리했지만, 전체적인 국면에서는 유방에게 앞서지 못했다고 말한다. 항우는 개별 전투 전술에는 뛰어났지만, 전쟁 전략에 앞선 유방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역사학자 리중톈은 다르게도 해석한다. 항우 주변에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 있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유방 곁에는 재물을 탐하고 색을 밝히는 사람과 보잘 것 없는 재능을 가진 '어중이떠중이'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왜 항우는 유방에게 패했을까?

유방 주위에는 이익만 밝히는 염치없는 인간들뿐이었다. 그들은 유방에게 기대어 작위(벼슬)를 구걸하고 식읍(재산)을 얻고자 했다. 이런 염치없는 인간들의 욕망을 잘 알고 있는 유방은 이들에게 적당히 벼슬과 재산을 주면서 잘 구슬려 이용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

리중톈은 "유방의 한나라가 시작된 후 중국에서 항우처럼 바보 같고 순진하고 제멋대로인 영웅은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음험하고 이익만 밝히는 비열한 음모가와 어리석고 진부한 서생들만 늘어났다"며 항우가 자신의 실패를 통탄하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라고 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항우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것으로, 이 때부터 중국에서 호연지기를 가진 호랑이와 표범의 시대가 끝나고 주인 말을 잘 듣는 개와 양의 시대가 문을 연 것"이라고 해석한다.

사람은 누구나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 있고 예의 바르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인생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중국 사람은 그렇게 살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기에, 그렇게 살았던 항우를 좋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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