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07 18:54최종 업데이트 18.11.07 18:54
 

미군정청이 사용한 중앙청 건물. 총독부가 사용했던 건물로 지금의 광화문 안쪽에 있었다. ⓒ 퍼블릭 도메인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의열단은 엄청난 거사를 준비하였다. 


창단 후 첫 의거의 대상은 조선총독부와 경제적 약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총독부의 선전기관 <매일신보> 등이었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병탄한 일제는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 운영하였다. 

초대 총독은 조선통감으로서 병탄을 성사시키는데 앞장선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임명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일왕의 직속기관으로 조선의 통치권을 휘두르는 사실상 점령군 사령부 격이었다. 
  

'안악사건' 동지들 백범이 환국한 후 안악사건으로 옥도를 치른 동지들과 함께 찍은 모습. 앞줄 왼쪽이 김홍량 ⓒ 기록사진

 

총독부는 병탄 직후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하여 민족지도자급 인사 600여 명을 검거한 것을 시발로 각종 악법을 제정하여 폭압통치를 자행하면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내세워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은 것을 필두로 온갖 탄압과 수탈을 일삼아 한국인의 원부가 되고 독립운동가들로부터 1차적인 파괴대상이 되었다. 

1916년 10월에 데라우치가 물러가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전 통감부 한국주차군사령관이 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ㆍ1혁명 후 물러나고, 3대 총독으로 역시 군인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하여 가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하고 있었다. 의열단이 가장 먼저 조선총독부 폭파를 결정하게 된 배경이다. 

일제는 한국(인)의 경제를 독점ㆍ착취하기 위해 1908년 서울에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설립했다. 한국의 산업자본을 키우고 개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동척은 일본의 제국의회에서 관련법을 통과시킨 후 서울에 본점을 두고 1천만원의 자본금으로 발족한 회사로서 주로 한국인의 토지매수에 힘을 기울여 1913년까지 4만 7천여 정보의 토지를 매입한 데 이어 1914년에는 농공(農工) 은행에서 거액을 융자받아 전라도와 황해도의 비옥한 논밭을 헐값에 매수하였다. 문중의 땅이나 국유지 등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거의 공짜로 빼앗다시피 차지하였다. 

이렇게 강점한 토지는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6할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받아내는 한편 춘궁기에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도 3할 이상의 고리로 추수 때 거두어들여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이같은 착취는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온 한국의 농촌사회가 악덕지주와 소작인 관계로 대체되고 동척은 한국농민의 원부가 되었다. 조선은행의 패악도 동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량진 3.1만세운동을 소요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는 <매일신보>(1919. 3. 25)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처음에는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지 않다가 3월 7일부터 '소요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왜곡 보도하기 시작했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선총독부는 기관지로 <매일신보>를 발행하였다. 1904년 영국인 배설이 창간하고 박은식ㆍ신채호가 주필을 맡아 항일민족지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를 병탄과 함께 탈취하여 '대한'의 제호를 빼고 <매일신보>로 개제하여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이른바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등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데 앞장섰다. 

이 신문은 일제 패망 때까지 총독부의 홍보선전을 대변하는 기관지 노릇을 하였다. '언론'이라 이름하기도 어려운 이 신문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인종이라는 것. △조선은 본래 독립한 역사가 없는 족속이라는 것, △조선인은 독립국가로 존속할 능력이 없다는 것, △그래서 일본의 점령지배정책이 합당하는 것 등을 들어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친일매국노들의 주장을 실었다. 조선민족의 원한이 맺힌 신문이었다. 

의열단의 특장은 즉각 행동에 있었다. 공리공론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면 곧 실천에 옮겼다. 1920년 3월 조선총독 등 적의 고관과 중요 관공서를 파괴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정보(첩보)망은 치밀했다. 의열단원 곽재기가 3월 중순에 만주 안동현에서 밀양의 김병완에게 보낸 폭탄이 일제경찰에 탐지되어 폭탄 3개를 비롯 관계자 12명이 검거되었다. 곽재기 등은 용케 피신하였다. 

다시 5월 중순 경에는 의열단원 이성우가 중국에서 폭탄 13개와 권총 2정을 구입하여 만주 안동현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아지트 역할을 해온 이륭양행(怡隆洋行)을 통하여 경남 진영의 강석원에게 보낸 것이 일경에 압수되고 관계자 윤치형을 비롯 6명이 검거되었다.

의열단이 창단 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첫번째 거사는 여러 경로를 통한 폭탄과 무기 수송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정보가 탐지됨으로써 실행하기도 전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단원들과 관계자들이 검거돼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고, 어렵게 구입한 폭탄과 무기가 모두 압류되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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